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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10년

opinionX 2017. 6. 7. 11:10

- 6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10년 전 우리는 뭐 하고 있었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별안간 질문을 던졌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지만 사람도 변한다. 캠퍼스에서 벗어난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른 곳에 와버렸음을 깨달았다. 하는 일도, 취미도, 식성도 달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대학 시절에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던 요소들이 우리 둘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별수 없이 10년 전의 그때를 더듬어야만 했다.

“대학생이었지.”

다음 말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난감했다. 대학 다니던 때가 더없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친구는 군대 다녀와서 복학한 뒤 어색하게 캠퍼스를 거닐곤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 생각하면 아득하다, 진짜.” 친구의 말에는 두 가지의 아득함이 다 담겨 있었다. 그 시절이 까마득히 오래되었다는 사실과 어떡하면 좋을지 막막했던 당시의 처지가. 그 아득함 때문에 나는 역설적으로 종종 대학 시절을 떠올리려 애쓴다. 어떻게든 그때를 내 심신에 새기고 싶어서, 어떻게든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상하게도 그 시절을 상기할 때마다 힘이 났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꿈이 등줄기를 타고 꼬물꼬물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내가 살던 곳은 신림9동이었다. 몇 년 전 대학동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도로명 주소를 표기하게 되면서 또다시 대학길이나 신림로로 불리게 된 곳이다. 나에게는 늘 ‘녹두거리’로 남아 있는 그곳을 생각하면 양가적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 감정은 본디 꿈으로부터 비롯됐지만 꿈이 이뤄지거나 이뤄지지 못했을 때에야만 그 민낯이 드러나곤 했다. 굳이 문을 열지 않아도 특유의 냄새를 풍기던 식당, 헉헉거리며 오르곤 했던 언덕길, 고시원과 독서실이 즐비하던 골목, 건물의 지하에는 으레 비디오방이나 PC방이 있던 곳이 바로 녹두거리였다. 골목마다 올망졸망 꿈이 늘어서 있던 곳이었다. 그 꿈 덕분에 절실했고 그 꿈 때문에 잔인한 곳이었다.

학생들이 방과후에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며 미래를 그려보던 곳, 고시생들이 고시 일정에 맞춰 학원과 고시원을 오가며 매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곳이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날 즈음에 학생들은 골목으로 삼삼오오 몰려들었고 고시원에 있던 고시생들은 고시 결과가 나오던 날에 일제히 PC방에 가서 결과를 확인했다.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과 현실을 직면하는 사람들이 한데 있었다. 환호하는 사람들과 낙담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열기와 냉기가 동시에 치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산책에 취미를 가지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당시의 나는 여기를 사랑해야겠다는 마음과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꿈을 꿀 때의 설렘과 꿈을 달성해야 하는 압박감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느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골몰하기엔 늦은 나이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기엔 지나치게 이른 나이였다.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은 학생에서 고시생이 되어 있었다. 학생이면서 고시생이 되어 있었다.

“아, 10년 전에 뭐 했는지 기억난다!”

친구가 웃었다.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다 보니 10년 전의 시간이 희미하게나마 떠올랐다. “나, 그때 영화를 찍고 있었어.” 어느 날 문득 산책하다 내가 쓴 시를 바탕으로 한 단편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영화감독이 되는 게 나의 꿈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찍고 싶다는 꿈은 늘 품고 살아왔었다.

다행히 공모전에 낸 시나리오가 당선이 되어 영화 제작 지원을 받게 되었다. 주변에 영화 찍는 친구들이 없어서 친구들과 후배들로 스태프를 꾸렸다. 학교와 녹두거리 인근의 단골 가게에서 촬영하며 나는 마침내 아득한 시절을 건너올 수 있었다. 내가 꿈을 꾸던 곳, 꿈속에서 한없이 막연해지고 더없이 달콤해지던 곳이었다. 꿈이라는 단어가 가깝지 않다는 것을 몸소 깨닫던 시절이자 꿈을 꿀 때에야 겨우 존재한다고 느끼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0년 후에도 오늘을 떠올릴 때 여전히 아득할까. 그때도 나는 여전히 꿈꾸기를 그만두지 않고 있을까.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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