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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친구가 사회로 돌아왔다.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내리 낳는 동안 7년 가까이 경력이 단절된 친구다. 원래 일하던 분야와 상관없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경력을 살려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니 더욱 기분이 좋다.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아이 둘 가진 엄마가 야근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곳이 어디 흔한가? 오랜만에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한 친구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밝고 활기차다.         

그런데 근무 시간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란다. 낮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 시간을 제외하면 딱 4시간. 하루 8시간 근무하는 보통 직장인의 절반이니 당연히 월급은 얼마 되지 않는다. 월급도 시간도 애매하니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친구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마. 그 시간이 엄마들한테 얼마나 좋은데…. 자리만 있으면 당장 일할 수 있는 엄마들 많아.”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고, 회사에 출근해서 일하다가 집에 올 시간이 된 아이를 데려오면 딱 맞는 시간이 바로 10시부터 3시라는 거다. 모든 주부들이 가장 원하는 시간의 일자리지만, 그 시간대의 일자리는 거의 없다.

문재인대통령이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 설치된 대한민국 일자리상황판 앞에서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솔직히 그런 일자리는 여자들에게 애도 키우고 일도 하고 살림도 하라는 것 아니냐”고 묻자 친구가 한숨을 쉰다. “그치, 맞는 말이지. 그래도 어쩌겠어. 어차피 집안일은 누군가 해야 하는 거고, 애도 키워야 하는데…. 남편은 맨날 늦게 오고, 첫째 학교 가면 돈 들어갈 일도 많아질 텐데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벌 수 있으면 그게 어디야.”         

착잡하긴 하지만 사실이다. 여자 친구들 중에 여전히 일을 하는 경우는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는 친구들뿐이다. 결혼한 친구들은 예외없이 일을 그만뒀거나 기약 없는 휴직 중이다. 회사가 어려워져서, 아이를 한 명 더 갖게 돼서, 눈치보여서, 봐줄 사람이 없어서, 아이가 아파서 등 개인의 사정은 각기 다르지만 모든 가정의 결론은 같다. 여자가 그만뒀다는 것.

“칸칸마다 한 명씩 성숙한 여자들이 들어 있고, 남자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그 닭장 안에서 멀쩡한 여자 하나가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오 년씩 십 년씩 매달리고…. 그리고 어느 날 새벽에 깨어나보면 발이 뻣뻣하게 굳어 영영 걸어나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야.” 20여년이 지났지만, 전경린의 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의 풍경은 현재진행형이다. 한국 사회는 ‘경력단절여성’이라는 단어를 딱지처럼 기혼 여성들에게 붙이고, “너는 이제 ‘경단녀’니까 좀 질이 낮은 일자리에서 일해도 돼”라고 선언하는 느낌이다. ‘경단녀’가 정책용어로까지 자리 잡았는데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 단어로 인해 여성의 ‘경력단절’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일본 정부는 직종·근무시간·근무지역 등이 한정된 대신 정년·임금·복리후생은 일반 정규직과 같은 ‘한정 정사원’이라는 정규직을 확대해 기업과 노동자 모두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하루 5시간, 일주일에 4일과 같은 식으로 시간을 조정해 일하면서도 계약 연장에 대한 불안감 없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도 ‘시간선택제 일자리’처럼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정부는 이 일자리를 ‘다른 조건은 정규직과 같지만 노동시간만 짧은 일자리’라고 강조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기업들이 정부 정책에 맞춰 급조한 일자리들은 2년 계약직으로 사라졌고, 고용노동부는 신규 채용을 통한 시간선택제 일자리 정책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다. 경력을 이어갈 만한 일자리 자체가 드문 여성들에게 정규직 여부는 둘째 문제다. 이전의 실패를 거름 삼아 ‘10시부터 3시까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일자리에 대한 관심이 높다. 대통령 집무실 내에는 고용률, 취업자 수, 청년실업률, 창업법인 수, 임금격차, 근로시간 등의 각종 지표가 담긴 일자리 상황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무적인 일이지만 대통령이 직접 챙긴다는 이 일자리 상황판에도 여성들의 일자리와 관련한 지표는 보이지 않는다. 일자리 상황판에 경력단절여성 관련 지표와 남녀 임금격차에 대한 지표부터 추가하고, 엄마들이 하루에 4시간이라도 정해진 시간 동안 걱정없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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