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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 사상은 잘못됐어. 반대하는 의견들을 무시하잖아!” 며칠 전 지역 행사에서 들었던 분노에 찬 발언이다. 토론회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참석자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이 분노를 표출하기 전까지 자신을 보라는 듯 손을 높이 들고 있었다.

당시 토론회는 혐오와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한 연대와 인권교육을 주제로 여러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발제자와 토론자의 발언이 끝난 뒤 이어지는 질문 시간에 그는 당신들이 반대 의견을 무시한다고 울분을 터트리며 격앙을 이어갔다. 끝을 예상할 수 없는 뜨겁고 거친 발언이 이어질수록, 청중과 참석자는 얼어붙고 초조해졌다.

그는 줄곧 동성애 반대를 주창하며 말을 이어갔다. 토론회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자신의 이야기들이었다. 얼마 전 열린 지역퀴어문화축제가 싫고, 지역 내 학생들이 벌인 성소수자 권익옹호 캠페인이 선동이라며 끔찍하다고 덧붙였다. 근래 벌어진 일련의 일들이 지역 사회 내 청소년들을 동성애로 빠져들게 하고, 감염시키고 있다며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주최 측에서 진정하기를 권하자, 그는 이내 흥분하며 반대하는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무시한다며 참석자들 사상이 오만하다고 평가했다. 끝내 참고 있던 이들 중 몇 사람이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듯 상대의 일방적인 발언을 그대로 지적하며 “그만하시라”고 외쳤다. 오가는 언성 속 장내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행사장 문 밖에서 다른 일행이 “동성애 반대”를 외치며 다른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결국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싸움이 번졌다. 평화로운 지역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혼란스러운 광경이었다.

열악한 인식과 환경에 처한 지역에서 실천 가능한 인권교육방안을 논하는 토론회에서 삽시간에 발생한 폭발적인 갈등이었다. 당시 나는 토론회에서 존엄이 얼마나 중요한지, 존엄이 차별과 혐오를 멈추게 할 수 있는 판단 근거는 어떻게 도출되는지 등을 설명하고 있었다. 일대의 소란 앞에서 나의 모든 말들은 순식간에 낡고 현학적인 것이 되었다. 아수라장 안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의 말들을 귀로 들으며, 눈으로는 책자 너머 출력된 활자를 읽으며 진정을 찾으려 했다. 그때 문득 내 글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당장 귀로 듣는 현장은 일촉즉발 상황인데 눈으로 보는 세상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어느 때쯤이었을까. 쉼없이 동성애 반대를 줄곧 외치던 이가 소리를 지르다가 문득 “선천적 동성애자는 존중하더라도…” 하며 망설이듯 말을 흐렸다. 동성애의 전염이 두렵다는 그에게도 최소한의 존중 여지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치켜들고 그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의 입은 격분의 단어를 내뱉고 있었지만, 시선과 팔다리는 출구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도 우리만큼  예기치 않은 상황에 긴장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신의 일방적인 말을 다 쏟아낸 뒤, 행사장 밖으로 곧장 빠져나갔다.

토론회를 마치고 귀경길에서 그의 떨리는 시선과 손가락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하면서도 아직 망설이게 하는 걸까. 얼굴을 마주할 여지가 남았던 것만 같은데 착각일까. 그도 나도 처음부터 피하지 말고 더 많은 대화를, 더 깊은 말들을 나눌 수 있었더라면.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연재 | 직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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