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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미국의 정상 간 첫 만남이었다. 70년이나 이어온 전쟁이 종결되고 새로운 동아시아 평화의 시대가 열리는 시점이다. 제재 속에서 고립되어 세계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고슴도치처럼 바늘을 곤두세웠던 나라가 드디어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역사적 대사변’을 눈앞에 두고, 통일의 열망에 불타던 젊은 날처럼 내 가슴은 뛰지도 않고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지도 않았다. 이번 조·미(조선과 미국) 회담은 통일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고, 통일의 전제인 평화를 논하는 자리였다. 겨우 6·25전쟁 종결의 문턱에 들어섰다. 싱가포르에서 조·미 합의가 이루어졌어도 앞으로 핵무기 해체의 길고 지루한 실무교섭이 이어질 것이며, 그 과정에 트럼프의 변덕을 비롯해 무수한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다. 비핵화 대 안전보장이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톱니바퀴가 맞물리듯이 순조롭게 돌아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미국이라는 거인의 패권에 맞섰던 다윗이 너무나 힘겨워서 싸우기를 그만두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이 위세를 부리고 고개 숙인 조선을 밟으려고 한다면 자존심을 걸고 결사 저항을 할 수도 있다. 미국이 조선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대하면서 공동의 안전과 평화를 실현하려고 하는 겸허하고 진지한 자세가 요망된다.
그러나 트럼프가 그런 성인군자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부서지기 쉬운 싱가포르 합의를 확고하게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이나 러시아 등을 보증인으로 세우는 방법도 검토해볼 만하지만, 무엇보다도 남북이 일체가 되어 분명한 평화의지로 미국의 변덕이나 갑질을 누르는 것이 가장 유효할 것이다. 또한 그것을 위한 남북의 깊은 신뢰구축과 공조의 실행이 한국이 오랜 대미 종속에서 벗어나고 참된 주권국가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남북이 합심하면 미국이 기를 쓰고 방해하는 명분도 없어질 것이다. ‘스스로 욕되게 한 연후에 남에게 욕을 먹는다’고 했다. 외국에서 미군의 주둔과 군사적 농단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 미국은 늘 “여러분들이 와달라고 해서 온 거지, 나가라고 하면 언제든지 나가주겠다”고 큰소리치곤 한다. 그러니 우리 남북이 힘을 모아 이 땅의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는 주권자는 ‘우리’임을 상기시키고, 불가침, 평화, 남북교류와 협력사업의 추진, 조·미(한·중) 평화조약 체결, 통일의 길로 나가는 순서를 밟아야 한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 머리 위에 분단이라는 부조리가 마른 하늘에 번개처럼 떨어졌다. 그러기에 그 부조리와 분단의 현실에 분노하여, 통일을 열망했다. 통일이라는 대사변으로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에게 통일에로의 길은 앞을 내다보기도 어려운 길고도 머나먼 길이다. 따라서 통일은 남북의 소통과 협력으로 민족적 응집력을 제고하고, 통일에 대한 희망을 젊은이들과 공유하면서 남북을 아우르는 우리 역량을 증대시켜 나가는 일이 급선무다. 그 과정이 바로 통일이다. 통일이란 두 개로 깨진 그릇을 다시 붙이는 것이라기보다, 실질적으로 분단의 고통을 하나하나 해소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젊은이들의 통일 의식이 희박해져 가고 있다고 하니 큰일이다. 한구영은 ‘한겨레 프리즘’ ‘청년, 왜 평화에 냉담한가’에서 “지금의 청년세대에게 남북 화해와 통일은 당연한 정언명령이 아니다”라고 한다. 판문점선언 다음날의 조사를 보니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보인 행동이나 발언에 신뢰가 가느냐’라는 질문에 ‘신뢰가 간다’는 응답이 전체 평균 77.5%인 데 비해 20대는 65.3%로 가장 낮았다. 지난 1월의 조사도 비슷했다. “북한에 대해 압박보다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전체 61.8%가 동의하는데, 20대는 54.8%로 가장 낮았다. 평창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에 거부감을 나타낸 것도 20대였다.
젊은이들의 이 반응은 오랜 세월 속에서 분단의 아픔의 기억도 희미해졌으며, 분단이 일상화되어 무감각해진 탓도 있겠으나, 한구영 기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방을 열렬히 맞이한 원인을 일제와 일본지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는 경제이익에 구하고 있으며, “통일이 열망의 대상이 되려면 독립이 약속했던 ‘자기 땅’에 대한 희망 정도의 약속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의 행동 동기 중에서 물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물론적인 과학적인 사고다. 그러나 해방에 대한 열광을 물질적인 동기에서만 구하는 것은 왜소화가 아닌지? 나는 해방의 열망을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는 생존본능에 있으며, 인간적인 자존심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을 통째 말살하려 한 일제에 대한 당연한 항거다.
한 기자는 젊은이의 통일 의식에 대해서도 “재벌들의 돈잔치로 귀착될 한반도 비전 앞에서 청년의 가슴은 뛰지 않는다. 공동의 자산을 나눌 비전 없이 청년의 냉소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경제적 동기부여만 하면 젊은이들의 통일 의식은 고조될까?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젊은이들은 한 푼의 이득도 없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사례도 많다. 그리고 2030세대의 개인주의적이고 취미적인 성향은 왜곡된 교육이나 정보기기에 지배당한 문화환경 탓도 있다. 무엇보다 인간을 극도로 소외시키고 분단하는 신자유주의에 그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가상적인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젊은이들은 소모적인 학력이나 스펙 획득 경쟁에 내몰린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항상 지극히 소수만이 성공할 수 있고 대다수가 탈락해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체제 속에서는 우리가 통일된다 해도 무한경쟁이 확대되어 인간소외와 파괴가 확산될 뿐이다. 상대평가나 업적주의의 폐해를 바로잡아, 모두가 함께 승자가 될 수 있는 공동체주의적인 ‘윈윈’(win win)의 원리로 모두 함께 통일시대를 지향해야 한다. 아울러 분단시대가 얼마나 처참하고 비인간적이었는가 역사교육도 해야 한다. 전쟁과 군대가 없는 사회의 전망이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기회를 줄 수 있는가! 거기서 통일된 미래에 희망을 품은 젊은이들을 배출할 수 있는 것이다.
<서승 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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