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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시선

딱 한 가지

opinionX 2022. 10. 17. 17:34

오랜만에 도시 중학교 진로특강을 하면서 아이들한테 물었다. “요즘 어른들한테 배울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나요?”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대답을 했다. “영어요. 그리고 수학요.” “국어요.” “선생님, 영업도 배울 수 있어요.” “아니 영업이라니요?” “우리 아버지가 자동차 영업 사원인데요. 자동차 많이 팔아서 상도 받았어요.”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 교실이 떠나도록 웃었다. 

“어른들한테 배울 수 있는 게 또 없을까요?” “집이나 땅을 사고팔아서 돈 버는 거요.” “주식 투기하다 망하는 거요.” “아무 데서나 막말하고 시치미 떼고 거짓말하는 거요.” “성적이 떨어지면 윽박지르고 겁주는 거요.” “사람 차별하고 무시하는 거요.” 

“선생님, 똑똑한 어른들한테 배울 게 딱 한 가지 있어요.” “한 가지라? 몹시 궁금하네요.” “저리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거요. 따라 살고 싶은 삶은 눈곱만치도 없는데, 입으로만 우릴 가르치잖아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동생도 다 알아요. 우리 미래를 어른들한테 맡겨서는 안 된다고요.” “여러분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가 막히는군요. 어른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네요.”

어른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고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어른은 곧 ‘얼’(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이들 눈에 비친 어른은 ‘얼’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얼’이 빠진(얼빠진) 사람일지 모른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한테 다시 물었다. “어른들한테 이런 거 배운 사람은 없나요? 남한테 지고도 행복해지는 법.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사는 법. 잘나고 똑똑한 사람보다 사람과 자연을 섬기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법. 자기 몸과 마음을 스스로 지키고 다스리는 법. 스멀스멀 밀려오는 숱한 탐욕을 줄이는 법. ‘지구가열화’와 기후위기를 줄이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 않고 걸어서 여행을 즐기는 법. 나무 한 그루 지렁이 한 마리 소중하게 여기는 법. ‘오래된 미래’인 농업과 농촌과 농부를 살리는 법. 다음 세대를 위해 단순하고 가난하게 사는 법. 땀 흘리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법. 바느질과 요리하는 법. 제 손으로 밥상을 차리고 밥상 앞에 머리 숙이는 법. 나를 살리고 서로를 살리는 대화법. 밝은 미래를 꿈꾸는 시민사회단체에 이름 밝히지 않고 기부하는 법. 모두가 가난하면서도 모두가 넉넉하게 사는 법.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 큰 시련이 닥치면 흔들리다 다시 일어서는 법. 자기 빛깔과 속도로 ‘나답게’ 그리고 함께 멋들어지게 살아가는 법…. 이 가운데 어른들한테 배운 게 몇 가지나 되나요?”

“선생님, 요즘은 돈만 있으면 못할 게 없는 세상인데 그딴 걸 누가 가르치나요? 우린, 똑똑한 어른들이 시키는 공부만 해도 제정신이 아니에요.”

공부만 해도 제정신이 아닌 아이들과 두 시간 내내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들으며 마음이 아팠다. 땀 흘리며 일하고 정직하게 살 생각은 쥐꼬리만큼도 없고 머리에 지식만 가득 찬 ‘똑똑한 어른들’이 아이들을 손아귀에 쥐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서정홍 농부 시인>

 

 

연재 | 시선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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