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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강의를 했다. 참석자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한 분의 사연에 속으로 조금 감동했다. 아들 등굣길을 바래다주다 바빠서 전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러다 문득 생각나서 나중에 아들에게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네가 급하거나 다쳤을 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건 장애인들이 열심히 싸워서 얻어낸 덕분이야.”

그 메시지가, 내가 매달 쓰는 칼럼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었다.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경험이나 기억 속에서 쟁점을 발견하고 의미 있는 고민을 던지는 일 말이다. 글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려면 사람들의 경험세계 속에 있는 것을 재료로 삼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 이야기는 사회가 공유하는 집단기억을 참조하며 갱신한다.

지지난달 미국에 갔을 때, 여성과 흑인에 관한 전시, 음악과 공연, 책과 저술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 예술과 활동들은 자신들의 투쟁 경험을 재료로 다루고 있었다. 단순히 역사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 약자 집단이 공유한 기억을 바탕으로 저항 운동의 서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장애인들의 투쟁으로 모든 시민들이 득을 보는 것처럼, 한 사회가 공유하는 운동의 경험과 성과는 그 사회의 지적, 물질적 자산이다. 사회의 집단기억은 지금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의 바탕에 운동의 역사가 있음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공유하며 현재와 연결함으로써 구성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는 집단기억을 얼마나 성실히 만들어 왔을까?

촛불시위를 떠올려 보자. ‘촛불혁명’이란 앙상한 수사만 남발된 채, 이전의 항쟁들이 장기적인 사회변화와 그것을 추동할 운동 주체를 남겼던 것과 달리 단발의 정권교체만 남았다. 사실 2016년 촛불은 2008년과 달리 광장에서 자발적 토론도 이뤄지지 않았고, 참여자에게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에 머무르도록 했다. 그것은 민주화 서사가 한국 민주주의를 일궈낸 운동의 다채롭고 풍부한 기억을 압축해 박제된 역사로 만든 것과 닮았다. 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각자의 문제를 풀기 위해 얼마나 촛불시위를 참조했던가? 우리는 촛불시위와 자신을 어떤 계보와 서사로 연결 짓고 있는가?

한국 사회가 간직한 운동의 기억을 현재화하고 그것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 치열하게 사회를 만들어 온 사회운동의 역사는 잊혀지게 된다. 기억을 제도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국가가 제도화한 기억은 ‘기득권’의 기억이라는 비판에 취약하다. 그렇게 민주화 서사가 조롱의 대상이 되면서, 그간의 사회적 성취마저 부정되고 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반대하고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려는 우파 포퓰리즘이 거기서 자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제도화된 기억을 지키는 일 이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한 진영의 서사에 대한 반발이 다른 진영으로의 투항을 낳는, 1987년 양당 정치체제의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다. 그 악순환은 1987년 체제의 극복을 반동적으로 이뤄내도록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체제의 진보적 극복을 위해선 제도화된 공식기억과 다른 대항적 서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 서사의 재료는 1987년 체제가 완벽히 포섭하지 못한 것에 있다. 바로 사회운동들의 집단기억이다.

<최성용 청년연구자>

 

 

연재 | 시선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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