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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보면 이상해. 왜 남자가 여자보다 오래 못 사는지 몰라. 신체구조가 그런 건지, 환경적인 요인 때문인지….” “왜요? 같이 기타 배우던 분들한테 뭔 일 있대요?” “아니, 그냥. 여자들은 나이 들어서도 다들 쌩쌩하던데.”

올해 칠순인 친정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흐렸지만 표정은 자못 심란해 보였다. 동네 복지센터에 함께 다니던 비슷한 연배 남자분들에게 ‘변고’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음이 분명했다. “할아버지들이 먼저 가셔야지 혼자 남아서 어쩌려고. 아버지,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뒤에 가시는 게 낫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가슴에 불을 지르는 눈치 없는 ‘나쁜 딸년’ 앞에서 아버지는 하고 싶은 말을 엉거주춤 삼키시는 듯했다.

아버지의 표정이 문득 생각난 건 며칠 뒤 택시에서였다. 3400원을 내기 위해 교통카드를 꺼내는데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기사는 겸연쩍은 듯 웃었다. “혹시 현금은 없나요?” “만원짜린데요.” “괜찮아요. 이렇게 쌈짓돈이라도 만들어놔야 나중에 밥이라도 눈치 안 보고 얻어먹죠.”

몇 년 전 세상을 휩쓴 화두로 등장했던 고단한 중년 남성들의 소외감은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그들의 소외감은 중·장년층에 머무르지 않고 전 세대로 확산됐다.

남자들도 여자 상사들 말에 성적 수치심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샤이니나 엑소에 헤벌쭉하는 이모뻘 여자는 괜찮고 에이핑크 좋아하는 아저씨는 변태냐. 남자들 복근은 문화 다양성이고 여자 각선미는 성 상품화인 근거를 대봐라. 10살 이상 어린 남자랑 맺어지는 게 요즘 드라마 트렌드라는데 이걸 신종 남녀평등으로 생각하느냐. 군 가산점이 뭐 어때서? 우린 목숨 걸고 군대 갔다 왔다! (하긴 임 병장 사건을 보며 특히 절감했다.) 최근 만났던 취재원과 동료, 친구, 선후배 등 많은 남자들은 아우성쳤다.

“10대 사내 녀석이라면 부산스럽게 날뛰는 게 정상 아냐? 어떻게 수업시간에 얌전히 앉아 있고, 책이며 과제물 착착 챙기고, 프린트물을 빠짐없이 노트에 붙여? 배점의 30%나 되는 수행평가 근거가 이러니 당최 여자애들을 이길 수 없지.” 지필고사 100점을 맞고도 수행평가 때문에 성취도 B를 맞았다는 중학생 아들 부모까지 비명 행렬에 동참한다. 그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지금 세상은 남자들에게 디스토피아다.

여성전용 버스 좌석


양성평등이 강조되는 탈권위시대. 사회 곳곳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 사고 체계엔 수백년간 내려온 DNA가 남아 있다.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고 힘든 것을 힘들다고 말하는 남자들이 찌질이나 루저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그중 하나다.

지난해부터 TV에서는 남자들이 자기를 보여주고 이야기하는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온다. 70대부터 20대 할 것 없이 온갖 수다를 떨며 내밀한 속마음과 푸념을 늘어놓고 허세를 부린다. 애들처럼 놀기도 하고 티격태격 유치찬란한 자존심 경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남자를 위한 문화적 영역의 확장으로, 여자를 위한 남자 이해법으로도 해석된다. 물론 개중엔 노골적 혹은 은밀한 방법으로 여성 비하 코드를 실은 것도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나중 문제다. 일단 불특정 다수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건 반갑다. 다투고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눈살 찌푸릴 만한 후폭풍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공론의 장에 풀어놓는 것은 건강해 보인다.

정작 위험하고 무서운 건 그들만의 폐쇄된 공간 안으로 감추고 응축시키는 거다. ‘김치녀’로 대변되는 여성 혐오증도 따지고 보면 여기서 출발한다. 더 끔찍한 것은 이 같은 병증이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박경은 대중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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