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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 노예는 시민들이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공동체의 유지에 필요한 생산활동을 떠맡으면서 정치에 참여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마저 노예를 ‘말할 수 있는 기계’에 비유하며 노예가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헌법상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된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을 정치에서 배제한 ‘노동없는 민주주의’는 과거 속의 일이 돼버린 것일까.

최근 우리 노동시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노동계급은 여전히 시민권을 얻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에서 2012년 야당 대선 패배의 원인을 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정치가 배제된 과정에서 찾는다. 그는 “민주주의 속에서 누구든 자신의 이해에 따라 스스로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하며 민주주의의 이상은 노동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최 교수는 이런 고민을 갖고 한때 ‘안철수 신당’의 산파로 참여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철수의 생각’은 그를 품지 못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빠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정치판은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장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시민들이 공적인 관심사로부터 멀어지면서 국가의 타락은 시작된다’고 했지만 근로 빈곤층 입장에서는 당장 생존의 문제 때문에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관심을 가질 겨를조차 없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주요한 생산을 담당하면서 ‘노예’와 별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전남 신안에만 ‘섬노예’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단에서 유명 브랜드 화장품을 만드는 파견 노동자, 백화점의 협력업체 서비스 노동자, 하루종일 고객의 불만과 짜증에 시달려야 하는 콜센터 노동자들은 모두 도시의 섬 속에 갇혀 사는 노예들이다. 스스로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조를 만들려 해도 해고를 각오해야 하고 노조를 결성해도 파업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 그대로 ‘일하는 기계’일 따름이다.

금속노조 현대로템지회 파업현장. (출처 : 경향DB)


노동계급이 민주주의 시민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 정치가 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장시간 노동, 저임금 노동, 고용불안정의 철폐는 인간다운 생활과 함께 ‘노동없는 민주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기본조건이다. 하지만 최근 국회 환경노동위 새누리당 간사인 권성동 의원이 당정협의를 거쳐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거꾸로 가고 있다. 1주 연장근로 한도를 12시간에서 20시간으로 늘리고 탄력적 근로시간제 적용기간을 3개월에서 1년으로 확대해 노동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릴 수 있도록 했다. 반면 휴일근로 가산임금을 없애버림으로써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줄어들게 만들었다.

인도의 간디는 국가를 망하게 하는 7가지 병폐 중 ‘원칙없는 정치’를 첫째로 꼽았지만 우리의 경우 ‘염치없는 정치’가 국가를 타락시키고 있다. 새누리당이 지방선거가 끝난 시점을 택해 노동계급을 배반하는 법안을 발의한 배경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2016년 총선까지 2년이나 남아있고 세월호 참사를 통해 유권자들이란 쉽게 지치거나 체념한다는 사실을 봤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노동자들은 눈앞의 생존 때문에 정치에 관심을 쏟을 여유조차 없다.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를 위해 투표장에서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확보해야 하는 이유다. 노동3권은 생존권을 넘어 시민권이 돼야 한다. 하지만 현재 눈앞의 노동법 개악작업을 보고도 노동자는 저항할 수단이 없다. 모든 정치파업은 불법으로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권리가 그렇듯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 ‘안온한 노예로 살 것인가, 위험한 시민으로 살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강진구 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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