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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로그인]발레, 1년

opinionX 2016. 2. 4. 21:00
나이 서른 아홉에 ‘발레를 배우겠다’고 주변에 큰소리 땅땅 쳤다. 담배를 끊거나 도박판에서 손씻을 때 동네방네 소문내는 것과 비슷하게, 이웃들의 기대를 나의 동력으로 지렛대 삼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매주 두세 번씩 동네 발레학원에서 수강한 지 만 1년이 됐다. 꽤 늘었으면 좋으련만 여전히 수업이 끝날 때쯤이면 혼잣말을 한다. “오늘도 탈춤 한마당이었구나.” 내 몸에 온전히 집중하는 그 짧은 시간이 위로가 되지 않았더라면 꾸준하게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몰락을 향해 질주하는 듯한 언어도단의 시절을 언어에만 지탱해 버티기는 조금 힘에 부치던 터에, 몸으로 하는 경험은 적잖은 깨달음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먼저 몸과 마음의 머나먼 거리를 처음 체감하면서 겸허를 배웠다. 왼발을 들어야지 생각했는데 정작 오른발이 나가있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움직이려던 반대 방향에 서 있기 일쑤였다. 분명 나의 뇌와 연결돼있는 뼈와 근육인데 좀처럼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하기 시작하면 더 허둥거리게 되고, 발레 스튜디오에서 봉산탈춤 제2과장 팔목중춤의 첫째 목중처럼 겅중겅중거리는 모습을 발견하고 자괴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땐 마음을 더 낮추었다. 내 몸뚱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데 세상에 무슨 일인들 내 뜻대로 될까 싶어진다. 나 자신과의 소통도 덜컹이면서 타인과는 ‘탯줄’로 연결된 듯한 완벽하고 매끄러운 이해와 소통을 상상하는 것은 그야말로 백일몽이었다. 어렵고 힘든 소통이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깝다.

‘빠름’에의 중독을 깨달은 것도 몸을 쓰면서였다.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장내전근, 반건양근을 비롯한 다리 안쪽과 뒤쪽 근육, 등과 허리의 근육을 써야 하는데, 처음엔 아무리 힘을 주고 근육을 쥐어짜도 되질 않았다. 정지 자세로 어금니를 꽉 물고 버틸 때면 벌개진 관자놀이에 혈관이 도드라지며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나는 소질도 가능성도 없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자 현명한 친구가 내게 조언했다. “근육이 자라는 데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야.”


그의 말대로 반 년이 지나자 불가능해 보였던 동작들이 하나씩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곧게 뻗은 다리를 뒤로 드는 아라베스크 동작도 90도 이상을 소화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간 나는 버튼을 누르면 곧장 작동하고, ‘엔터’를 치면 결과값이 0.01초 안에 뜨고, 지불한 가격만큼 총알배송으로 상품을 받는 편리한 습관에 빠져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식물도, 감정도, 아이도, 어른도 자라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키우는 사람이 작심한다고 정밀하게 성취할 수 있는 목표치가 아니다. 때로는 최선을 다하면서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들도 있다. 그건 수동적으로 무력한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인내하는 것이다.

익숙함이 무지함과 곧잘 패를 이룬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내가 등을 곧게 펴는 것을 넘어서 몸이 뒤로 약간 기울어진 상태라는 걸 강사의 지적을 받고서야 처음 깨달았다. 서 있는 자세부터 걸을 때 무게중심까지 모두 잘못돼 있었다. 너무 명백한 사실인데, 매일 보면서도 인지에 실패했다. 그건 마치 집안 세간에 눅진하게 들러붙은 세월의 불쾌한 먼지를 손님은 알아차리는데 집주인은 포착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때로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지 않으면 익숙함에 함몰될 수 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은 똥이 익숙해서일지도 모른다. 나를 제일 모르는 것이 나 자신일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놓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깨닫는다고 그게 ‘변화’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깨달음을 한 줌씩 손에 쥐었다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무지의 영역에서 앎의 불꽃을 보았다는 충만감이나 자기애는 스스로를 기만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많이 깨달았지만 지금 내게 남은 것은 그 반짝임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도 잊지 않기로 한다.


최민영 | 미래기획팀 차장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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