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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봄, 세상의 도의를 바로 세우겠다며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봉기한 농민군이 내건 강령 중 하나는 ‘구병입경 진멸권귀(驅兵入京 盡滅權貴)’였다. ‘병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 있고 귀한 자들을 모두 없애버린다’는 뜻이다. 그들은 서울의 ‘권귀’들에게 왜 그토록 원한을 품었던 것일까?
이로부터 100년 전, 정조는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모두 서울 남산과 북악 사이에 사는 집안 출신뿐’인 현실을 개탄했다. 우수한 교육자원이 서울에 몰려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권세 있는 자들이 자기 지위를 대물림하기 위해 온갖 부정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게 근본 원인이었다. 부정행위는 답안지에 암호로 어느 가문 출신인지를 표시하거나 사전에 시험문제를 빼돌리는 일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공공연한 대리 시험으로까지 발전했다. 학력이 아니라 인맥이 합격 여부를 결정했던 것이다. 서울의 이른바 ‘명문가 자제’들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시골 선비들은 수십 년을 공부하고 수십 번 과거를 치러도 급제하지 못했다. 급제하더라도 미관말직을 전전하다가 곧 그만두어야 했다. 게다가 서울의 ‘명문가’들은 혼인관계로, 사제관계로, 친구관계로 자기들끼리의 공고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질적인’ 존재가 그 안에 끼어드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그 네트워크 안에서, 그들은 ‘아무 짓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며 풍요와 향락을 한껏 누렸다. 이들이 당대의 ‘기득권 세력’이었다. 19세기의 서울은 이들이 흥청망청하며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공간이었으나, 같은 시기의 농촌은 불만과 분노, 적개심이 들끓는 민란의 공간이었다. 소작농과 자작농뿐 아니라 시골 양반들조차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 있고 귀한 자들을 다 죽여 없애자는 과격한 주장에 동조했다. 이것이 조선 왕조 체제가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전조(前兆)였다.
며칠 전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석상에서 “정치권의 일부 기득권 세력과 노동계의 일부 기득권 세력의 개혁 저항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국민과 함께 개혁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지금이 19세기라고 치면, 시골 양반과 자작농들을 ‘기득권 세력’으로 지목한 셈이다. 물론 19세기 소작인의 처지에서는 자작농도 부럽고, 벼슬자리 하나 못 얻은 주제에 행세하려 드는 시골 양반들도 꼴 보기 싫었을 터이다. 그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억울함, 불쾌감, 시기심 등은 대개 자기보다 조금 처지가 나은 주변 사람들로 인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자기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진짜 기득권 세력인 세습 ‘권귀’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가 선동해서가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다.
5일 서울 대학로에서 2차 민중총궐기 평화행진을 마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마무리집회를 갖고 있다._경향DB
소작농, 자작농, 시골 양반 할 것 없이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를 다 없애자’며 봉기했던 게 불과 120년 전이다. 지금은 그런 권귀가 확실히 사라진 시대일까? 수많은 젊은이들이 수십, 수백 번씩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쓰면서 절망을 쌓아가는 반대편에는, 부모 덕으로 어려움 없이 취업해서 승승장구하는 극소수의 젊은이들이 있다. 땅콩을 봉지에 넣은 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비행기를 후진시키라고 지시한 사람도 있고, 전화 한 통으로 주변 인물을 취직시키는 사람도 있으며, 해외 출장에 가족을 데리고 가서 엄청나게 비싼 밥을 사 먹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이미 공사(公私)의 경계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충분히 오만하고 방자하며, 그들 사이의 공고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두고 있다. 게다가 이런 특권적 지위의 세습은 현재 한국 사회의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다.
세습 기득권의 문제는 좌절감, 적대감, 시기심 등의 부정적 감정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 한국의 사회 발전과 경제 성장을 뒷받침한 강력한 힘은,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특권의 세습 질서가 뿌리째 흔들린 데에서 나왔다. 천민의 자식이 귀족의 자식을 앞지를 수 있는 문이 열렸고, 그 문을 통과하려는 열정이 사회 곳곳에서 끓어 넘쳤다. 그런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을 죽이는 짓이다. 고작 정규직 노동자를 기득권 세력으로 지목해서 비정규직과 같은 처지가 되라고 요구하는 시대에, 무슨 발전의 희망이 있겠는가?
한국 사회와 경제를 위해 지금 시급히 개혁해야 할 것은 ‘진짜 기득권 세력’의 관행과 문화, 그리고 그들이 구축해 둔 특권의 네트워크다. 진짜 기득권 세력이 ‘기득권 세력’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정규직 노동자에게 붙여주는 건, 그들 자신이 신성불가침의 지위에 있음을 선언하는 것일 뿐이다. ‘신’과 같은 지위를 누리는 세력이 있는 사회에는, 결코 희망이 깃들지 않는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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