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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또 졌다. 어쩌면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안토니오 그람시) 딱 그 상황이다. 여기저기서 야당 ‘씹는’ 게 국민 스포츠가 됐다. 망해야 한다, 무너져야 한다는 소리가 충격요법 축에도 못 낄 지경이다. 비슷한 패배, 비슷한 대책이 반복되면서다. 그래도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번 패배가 치명적이라는, 그 정도다. 역대 최대 의석(130석)으로 패한 선거다. 어디 그뿐인가. 소선거구제 도입 26년 만에 ‘안방’(전남 순천·곡성)까지 내줬다. 중요한 건, ‘그물코’가 빠져버렸다는 사실이다. 호남과 민주화를, 민주화와 새정치를 이어주던 제1야당의 ‘그물코’ 말이다. 앞으로 정치라는 망망대해에서 무엇을 건질 수 있을까. ‘손학규’라는 대어를 잡았다 놓친 세월을 들여다보면 절망적이다.

큰 바다(수권)를 꿈꾸지 않는다. 손학규 상임고문은 지난달 31일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3월 ‘낡은 수구와 무능한 좌파의 질곡을 깨고 새 길을 창조하기 위해’ 한나라당을 탈당한 지 7년4개월 만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손 고문을 “안(한나라당)에서도 춥고 밖(대통합민주신당)에서도 추운” 사람이라고 했다. 밖에서 더 추웠다. 손 고문의 한나라당 탈당 이후 “보따리장수같이 정치해서야 나라가 제대로 되겠나”(노무현 전 대통령), “손학규 영입은 정치적 매춘행위”(정청래 의원), “손학규가 민주개혁세력 정체성에 맞나”(이해찬 의원) 등 온갖 화살이 쏟아졌다. 그러면서도 제1야당은 손 고문을 불쏘시개로 썼다. 그것도 가장 추울 때만 골랐다. 두 번 당 대표를 맡겼다. 2008년 18대 총선 직전 수락한 대표직은 ‘독배’라 했다. 당시 통합민주당은 대선 패배 후 18대 총선에서 40석 건지면 다행이라 할 지경이었다. 2010년 10월에 또다시 대표에 올랐다. 7월 재·보궐선거 패배 뒤끝이다. 온갖 보궐선거에 내보냈다. 그것도 가장 어려운 곳만 골랐다. 2011년 4월 경기 분당을에서 이겼지만, 2014년 7월 수원병에선 졌다. 한 당직자는 “손 고문이 새누리당에선 배신자로 몰릴 수 있지만, 적어도 야당에선 헌신하고 희생했다”고 평가했다. 문학평론가 전영태의 저서 <낚시>에 나오는 “우정이란 날씨 좋을 때는 두 사람이 충분히 탈 수 있으나, 날씨가 나쁠 때는 오직 한 사람밖에 탈 수 없는 배”라는 말이 제1야당과 손 고문의 관계일 수 있겠다.

손학규의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 (출처 : 경향DB)


손 고문에게 새겨진 ‘주홍글씨’는 제1야당 스스로 계파 연합체를 고백한 결과다. 친소관계가 정치의 본질인 정당. NL은 PD를 공격하고, NL과 PD가 연합해서 비운동권을 공격한다. 기어코 ‘나와’ 다른 점을 찾아 배척하는 버릇이 몸에 뱄다. 남 탓하고 반사 이익에 익숙한 정치는 이런 습성에서 비롯됐다. 당 대표보다 계파 수장이 더 잘 챙겨주니, 당 대표보다 계파 수장 의견을 더 따르는 정치문화도 필연적이다. 자꾸 야당만 하느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계파 연합체만 문제가 아니다. 여지껏 야당 정치를 상징하는 변변한 의제 하나 없다. 손 고문은 수권 비전으로 ‘저녁이 있는 삶’ ‘제3의 길’ ‘협동조합기본법’을 내놓았다. 하지만 손 고문은 정통성에 집착하는 제1야당을 극복하지 못했다. 물론 수권에 치중하느라 진보와 중도개혁세력 통합을 당심보다 우선시한 건 전술적 실패다. 야당 문법을 몰랐다는 말이다. 2007년 8월 당 대선 경선 때 “80년 광주에 갇혀선 안된다”고 한 것만 봐도 그렇다.

제1야당 그물코가 앞으로 얼마나 더 찢길지 모르겠다. ‘손학규’ 같은 대어가 줄줄이 빠져나갈 수도 있다. 뭘 어떻게 하자는 말은 그동안 할 만큼 했다. 당은 버리고 외면했어도 스스로 당을 사랑하고 키워온 사람들에게 이 상황이 얼마나 깊은 죄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지금은 “돌밭을 오래 걸어야 할 때, 발이 아파야 할 때”(신동호, ‘水石’)다.


구혜영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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