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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규 | 정치부 차장


11세기 영국은 북유럽 바이킹 데인족 출신 왕 ‘크누트 1세’의 폭정에 시달렸다고 한다. 런던에서 가까운 코번트리 영주 리어프릭(Leofric)도 데인족이었다. 그의 부인 고다이바(Godiva)는 토착민인 앵글로색슨족으로, 농민들의 고달픔에 가슴 아파하며 남편에게 세금을 깎아달라고 요청했다. 리어프릭은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라. 그러면 세금 감면을 고려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고다이바는 번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농민들은 영주 부인의 헌신에 감동받았다. 그녀가 마을을 도는 순간 그 누구도 바깥을 내다보지 않기로 했다.


고다이바는 벌거벗고 말을 탄 채 마을을 돌았다. 코번트리는 쥐죽은 듯한 적막과 의도적 무관심에 휩싸였다. 이 모습은 존 콜리어라는 19세기 신고전주의 화가가 그린 작품 ‘고다이바 부인’에 잘 묘사돼 있다. 고개를 푹 숙인 고다이바는 흰 알몸으로 붉은 마구를 씌운 말을 타고 간다. 문과 창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다.


모든 일에는 곡절이 있는 법. 양복 재단사 톰은 성적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커튼을 들췄다. 알몸을 보려는 순간 그는 눈이 먼다. 신의 징벌이다. ‘관음증 환자’를 뜻하는 ‘Peeping Tom(엿보는 톰)’이 예서 유래했다. 이는 역으로 고다이바 헌신의 숭고함과 치열함을 보여준다.


이 일화의 건너편에 한국 유력 정치인이 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다. 박 후보는 14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 롤모델로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꼽았다. “파산 직전에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국정을 이끌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럴 법도 하다. 어머니 앤 불린의 참수형, 언니 메리 1세 사후 25세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는 유럽 최강국인 에스파냐 왕 펠리프의 구혼을 거절했다.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고 선언하고 45년간 영국을 통치했다.


업적은 눈부시다.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물가를 잡았다. 빈민구제법을 실시하고 중상주의를 채용했다. 해상왕국 기초도 이때 이뤄졌다. 위대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철학가이자 사상가인 프랜시스 베이컨, 시인 에드먼드 스펜서의 활약 등 가히 르네상스를 꽃피웠다. 요정 여왕(Faerie Queene)으로 불리던 그녀는, 처녀 여왕으로 생을 마감했다.



마르쿠스 헤라르츠가 그린 초상화는 절대군주의 위엄을 잘 나타낸다. 근엄한 흰색 궁정복을 목까지 채워 입고 있다. ‘그녀는 주지만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보복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되갚아줄 경우에 그녀는 권력을 증가시킨다’는 라틴어 명문이 초상화에 적혀 있다.


박근혜 후보도 20대 초반에 퍼스트 레이디를 경험하고, 결혼하지 않았다. 박 후보의 경제민주화와 생애맞춤형 복지 등은 엘리자베스 1세의 빈민구제법 등 국민 사랑에 닿아 있다. 그러면서 여왕의 해상무역 확대, 중상주의는 새누리당의 주요 기조인 성장정책과 맞물린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임종 전 마지막 의회 연설에서 “나보다 강하고 현명한 군주는 과거에 있었고 앞으로 있을지 모르지만 나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아무리 백성을 사랑했어도, 결국 군림하고 절대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실제 엘리자베스 1세는 국왕을 종교상의 최고권위로 인정받도록 하고, 전 국민에게 국교회 의식과 기도서 독경을 강제했다. 의회에는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하며, 강력한 사법·행정기능을 가진 추밀원 중심의 정치를 했다.


그렇잖아도 ‘공주’로 불리던 박근혜 후보는, 온몸을 호화로운 관복으로 꽁꽁 싸매고 추밀원 등 소수 의견을 수렴하며 절대권력을 누리는 여왕을 꿈꾸는 듯하다. 


하지만 21세기 시민이 원하는 리더십은 내리사랑하는 절대군주보다는, ‘음험한 엿봄’조차 저어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벗어던진 채 물심으로 헌신하는 고다이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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