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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융성이 국정 지표 중 하나로 된 덕인가. 인문학이 시대의 유행어가 된 느낌이다. 인문학을 벼랑 끝에 내몬 이들이 입만 열면 인문학이다. 여기에는 대통령이나 교육이나 문화 관련 부처, 대학뿐 아니라 경제 관련 부처도 포함된다. 인문학이야말로 창조경제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CEO 인문학’ ‘아이폰 인문학’이 등장한 지는 이미 오래다. 슬라보예 지젝의 무겁고도 난해한 저작 초판이 출간 열흘 만에 소진되고 대학 밖에서 인문학 간판을 내건 단체만도 100개나 되는 시대, 바야흐로 인문학의 전성시대다.


스티브 잡스는 생전 신제품 아이패드 발표회 자리에서 “애플의 기술은 인문학(Humanities), 교양과정(liberal arts)과 결합되어 있다”고 밝혔다. 잡스의 기술과 인문 융합은 기업의 인문학 바람을 일으켰다. _ 경향신문 자료사진


때 맞춰 나도 인문학을 내걸고 숟가락 하나 얹었으니 제대로 흐름을 탄 셈이다. 문제는 공동체에서 나의 주 임무가 고상한 강의나 세미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쑥스럽게도 내가 주로 하는 일은 청소와 설거지다. 누군가 커피를 엎지르면 닦아내야 하고 어디선가 바퀴벌레가 나타났다고 비명을 지르면 달려가 잡아줘야 한다. 복사와 프린트도 내 일이고 프린터에 종이가 걸리면 빼 내는 일도 내 차지다. 빔 프로젝터에 연결한 낡은 노트북이나 스피커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고쳐야 하는 것도 내가 할 일이다. 그 기술이라는 게 기껏 코드를 다시 꽂거나 손으로 탁탁 치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처음 오는 이에게 찾아오는 길을 안내하는 것도, 이들을 맞이하는 것도 내가 하는 일이다. 돈이 없는 탓이다.


돈이 없는 게 당연하다. 우리가 하는 인문학이 창조경제의 바탕인 돈 되는 인문학과는 거리가 먼 까닭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외려 그 반대다. 사유다. 사유의 연습, 사유의 노동으로 자본과 과학기술, 대중문화가 맹목으로 팽창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사상 유례 없이 풍족한 시대를 살면서도 이토록 피폐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파헤치는 것이다.


돈이 없다고 해서 가난한 것은 아니다. 한때 나만의 일이던 것들이 갈수록 공동의 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만 해도 그렇다. 커피가 떨어질 만하면 누군가가 가져오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사무실 테이블에는 먹을 것들이 준비돼 있다. 청소와 설거지에 나서는 이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나의 주업이 위태로워지기도 했다.


인터넷 카페 별명이 ‘아로리’인 청년이 있다. 참여하던 공부 모임이 흩어지면서 한동안 공동체에 나오지 않던 그를 만난 건 뜻밖에도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일이 있어 일찌감치 공동체로 나왔다가 열심히 물걸레질을 하는 그를 발견한 것이다. 몰래 청소하다 들킨 그는 “일찍 출근하며 이곳을 지나다…”라며 어색하게 말을 얼버무렸던가. 충북 보은에서 번역 일을 하며 농사를 짓던 그가 공동체를 처음 찾은 것은 재작년 이때 즈음이었다. 그 먼 곳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등을 읽는 서양고전철학 세미나에 참여한 것이다. 영어로 읽는 인문학, 프랑스어로 읽는 인문학 같은 세미나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그가 아예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이 지난해 봄. 공동체 인근의 한 공방에서 목공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즐기면서도 수행하듯 공부에 임했다. 몇몇 어려움도 있었다. 그가 희망하는 여러 공부 모임에 참여하기에는 공방 일이 지나치게 바빴던 것이다. 그나마 참여하던 세미나도 이를 이끌던 학자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해산되자 당분간 그가 공동체에 올 일도 사라졌다. 모든 만남에는 헤어짐이 잉태되어 있지만 사람의 드나듦이 이곳처럼 잦은 데도 드물다. 새로운 강좌나 세미나를 개설하며 마음이 설레는 건 아로리 같은 이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러스트 _ 김상민


처서가 지나면서 무더위도 한풀 꺾였다. 선선한 바람을 타고 대학 바깥의 여러 인문학 공동체에서는 수많은 강좌나 세미나가 시작된다. 이는 논어, 맹자, 장자 강독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니체, 들뢰즈, 푸코, 지젝에 이르는 강좌와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는 대안연구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기왕의 발터 베냐민에 더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 읽기와 이반 일리치 저작 읽기도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는 세미나 중 하나다.


책 읽기, 글 쓰기, 토론처럼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지는 공동체의 인문학은 돈벌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장식품이나 한담도 아니다. 피폐한 시대, 인간적 삶을 위한 성찰과 연대에 필수적이면서도 절절한 화두다. 새롭게 시작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만 해도 자본과 욕망을 포괄하며 우리 시대를 통찰하는 멋진 이론이었음에도 제대로 착근되지도 못한 채 우리에게서 멀어져가지 않았는가. 푸코가 “젊은 날 이들을 만났다면 학자로서의 평생을 비판 이론의 주석가로 살았을 것”이라고 고백한 이론이다. 한물간 느낌이 없지 않은 비판 이론을 지금 여기서 공부하는 건 세계화, 정보화의 벌판에서 편익과 효율과 욕망을 좇다 막다른 곳에 내몰린 우리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현대 기술 문명을 뿌리에서 비판하며 온몸으로 대안을 찾고 실천한 이반 일리치 저작 읽기 세미나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2400년 전,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물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지혜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이제 이들의 저작을 공부하며 우리도 질문하고 사유할 것이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자본이란 무엇인가, 다시 정의란, 지혜란, 용기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동참하기 위해 잠시 이곳을 떠났던 사람과 새로운 사람들이 어우러져 공동체를 찾을 것이다. 새로운 인연의 시작도 좋고 잠시 끊어졌던 인연의 재개도 훌륭하다. 아는가, 아로리처럼 멋진 이들이 우르르 공동체를 찾을지.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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