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계단식 강의실이 등장한다. 느리지만 정확한 어투로 계약법을 설명하는 노교수의 눈빛이 형형하다. 그는 종강을 선언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강의실 문을 향해 걸어간다.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원 기립박수를 날린다. 놀란 기색으로 제자들을 응시하는 교수. 영화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의 한 장면이다.

지금까지 이 영화를 다섯 번 보았다. 최선을 다한 뒤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건네는 작품. 영화는 자신의 실제 대학생활을 소재로 한 작가의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에서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인물은 계약법을 가르치는 킹스필드 교수이다. 법대생들은 수업시간마다 교수의 집요한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에 시달린다.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 포스터

얼마 전에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지인으로부터 답답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원에서 실권을 가진 인문학 교수의 횡포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의시간에 대놓고 스승의 날 선물을 하려면 마시면 사라지는 고급양주 말고 오래도록 가치가 남을만한 선물을 달라는 발언. 논문지도랍시고 학생을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리게 해놓고 자신에게 확인전화를 했다는 이유로 폭언하는 사례.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을 논문평가에서 고의적으로 탈락시키는 횡포 등을 성토했다.

이 정도면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갑질교수임에 틀림없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저질교수의 전횡이 대학가에서 전방위적으로 벌어진다는 거다. 게다가 실력이 처지는 교수일수록 정치적인 입지에만 골몰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대학총장과 각별한 사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해당 교수는 대학의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적폐임에 틀림없다. 오로지 실력으로 학생과 소통하는 킹스필드와는 정확히 반대편에 위치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교수가 갑의 위치를 점할 수 있는 무기는 다양하다. 학점, 논문평가, 조교 및 강사채용 등이 그것이다. 반대로 학생이 문제교수에게 자신의 권리를 피력할 수 있는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교수평가제가 시행되고 있다지만 무능교수를 대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는 갖춰져 있지 않은 형편이다. 사설학원에서 지속적으로 콘텐츠를 개발해야만 살아남는 프리랜서 강사와는 경쟁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존재이다.

소개한 영화의 무대는 미국 보스턴 일대로 유학하려는 학생들이 한 번쯤은 진학을 꿈꾸는 하버드대학이다. 게다가 졸업과 함께 부귀영화가 보장된다는 법대가 그 배경이다. 금수저와 흙수저 영재들이 고루 모인 학업모임에서는 풍부한 법학지식만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할 수 있다. 게다가 킹스필드 교수의 강의실에서는 학생의 출신이나 교수와의 사적인 관계가 예외사항으로 통하지 않는다.

쏟아지는 과제물을 감당하려고 새벽까지 책과 씨름하는 영화 속 법대생의 이미지가 신선해 보였다. 삶의 열정이 내리막길을 걸으려 하는 기색이 보이면 어김없이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을 찾았다. 누구든지 현실 속에서 넘어지거나 다치는 사건을 경험한다. 하지만 어떤 자세로 다시 일어서느냐가 인생 후반부를 좌우한다. 킹스필드는 오로지 강의와 질문, 과제를 통해서 무거운 현실과 맞서는 방법을 전파한다.

지인은 논문심사를 기다리는 연구생들이 갑질교수가 안식년을 가는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사라져야 공정한 논문평가가 가능하다는 신세타령이 이어졌다. 과연 한국 대학가에는 몇 퍼센트의 교수가 킹스필드에 근접하는 학문적인 존경을 받는지 궁금하다. 연구는 고사하고 정치적 가치관이나 소신도 없이 오로지 권력만을 위해 부나비처럼 외부활동에 전념하는 폴리페서 역시 존경의 대상은 아니다.

물론 부단한 노력으로 학문에 매진하는 교수다운 교수가 일부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들만으로 대학의 미래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늦었지만 학생을 종으로 취급하는 갑질교수를 통제할 전방위적인 제도가 갖춰져야 한다. 이를 통해서 실력있는 교수가 대우받는 정상적인 대학으로 환골탈태해야만 한다. 동시에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의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마지막 강의를 마친 뒤에 후배들의 기립박수는 고사하고 손가락질은 받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대의 이름은 이상한 대학에서 서식하는 교수님이다.

<이봉호 | 대중문화평론가·<음란한 인문학>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