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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끝난 뒤의 ‘빈 들판’이란 말은 이제 들어맞지 않는다.

농촌에서는 ‘공룡알’이라고도 부르고 도시 사람들은 ‘마시멜로’라고도 부른다. 논바닥 위에 있는 커다란 흰 덩어리를 부르는 별명들인데 ‘볏짚 곤포 사일리지’라고 한다. 트랙터에 곤포 사일리지 기계를 달아 추수하고 남은 볏짚을 덩어리로 만 뒤 발효액을 뿌린다. 비닐로 단단하게 감아 숙성시켜서 소의 사료로 만드는 것이다. 볏짚 한 덩이가 작은 것은 200㎏에서 큰 것은 500㎏ 정도인데 500㎏ 한 덩어리가 5만원 선에서 거래되니 알뜰살뜰 모아서 공룡알을 만들어낸다. 곤포 사일리지는 소가 먹는 겨울 김장이라고 보면 얼추 의미가 맞을 것이다.

우리가 먹는 최고 등급의 쇠고기는 마블링이 얼마나 골고루 퍼져서 부드러운 맛을 주느냐에 따라 등급이 갈린다. 마블링이란 것은 결국 많이 먹고 덜 움직여서 몸에 지방질을 쌓는 과정이다. 그런데 풀만 먹어서는 그 과정이 잘 안 이뤄지다 보니 에너지가 많은 곡물 사료를 먹여야만 한다.

사료는 크게 농후사료와 조사료로 나눈다. 농후사료는 말 그대로 ‘농후하게’ 사료에 영양을 강화하는 과정을 거친 사료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백질 성분이다. 아무래도 고기와 젖을 만들어내는 일이니 단백질 성분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곡물을 주요 원료로 한 농후사료를 먹으며 동물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축적한다. 게다가 쟁기질을 할 일도 없고 산책을 따로 할 상황도 아니니 움직일 일이 없는 것이 가축들의 처지. 그래서 켜켜이 기름이 쌓여 우리에게 기름진 고깃덩이로 다가온다. 하지만 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한 것이 섬유질이다. 현대인에게 필수라는 섬유소는 원활한 배변활동을 위해 필요한데, 가축들도 생활이 현대인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섬유소가 꼭 필요하다. 특히 소와 같은 반추동물은 본래 풀을 먹고 오래도록 되새김질하면서 거친 섬유질을 소화시키는 데 공력을 쏟는 동물이다. 그래서 가축들에게도 거친 사료, 혹은 조사료를 반드시 먹여야 한다. 조사료의 ‘조(粗)’가 ‘거칠다’는 뜻이다.

본래 볏짚은 겨우내 소의 중요한 먹잇감이었다. 작두로 볏짚을 썰고 훑은 콩깍지, 왕겨 가루, 콩가루 등을 잘 섞어 쇠죽을 쑤어 먹이곤 했다. 하지만 이제 축산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서 자가 생산 사료로는 감당할 수 없고 시판용 사료로 가축들을 먹인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사료 자급은 쉽지 않고, 사람들은 고기를 탐하다 보니 당연히 사료용 곡물을 수입해서 고기를 길러낸다. 부업으로 축산을 하던 시대에는 ‘소꼴’이라 하여 풀과 농업 부산물로 한두 마리 정도를 키웠다. 그때는 조사료 비율이 농후사료보다 훨씬 더 높았지만 지금은 그 반대로 농후사료의 비율이 훨씬 높아졌다.

볏짚은 농가의 중요한 살림 밑천이기도 했다. 초가집 지붕 역할도 하고 가마니나 바구니를 짜서 생활도구로 쓰거나 내다 팔아 가욋돈을 벌어들였다.

이제 사람들은 쌀 대신 먹을 것들이 지천인지라 1인당 쌀 소비량이 채 60㎏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1인당 먹는 고기가 평균 일년에 50㎏에 육박하니 머지않아 쌀과 고기 섭취량이 비등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소 먹이는 사료용 쌀인 총체벼를 정부에서 권장하기까지 한다. 인간은 쌀을 먹고 볏짚은 소가 먹는 것이 순리였던 시절이 이제 끝이 나려는가 보다. 공룡도 멸종된 지 오래되었는데, 들판의 ‘공룡알’도 멸종할 날이 끝내 오고야 말까.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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