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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등재가 결국 무산됐다. 위안부의 강제 동원을 아직까지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저지공작 때문이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일본이 유네스코 재정 분담금 지불을 ‘무기’로 유네스코를 압박했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제기구인 유네스코가 그 돈 앞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등재심사 과정 중 유네스코 안팎에서 흘러나오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이 기록물은 지난해 5월 ‘일본군 위안부의 목소리(Voice of the Comfort Women)’란 명칭으로 신청할 때만 해도 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의심받지 않았다. 한 국가가 아니라 국제연대를 통한 공동추진도 주목받았다. 한국과 중국, 일본, 필리핀, 네덜란드 등 8개국 14개 시민단체가 국제연대위원회를 구성, 등재 작업을 이끌었다. 위안부 관련 기록물을 소장한 영국의 임페리얼전쟁박물관도 참여했다. 일본군의 위안부 운영 관련 사료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록 등 세계에 흩어져 있던 기록들이 한데 모아졌다. 무려 2744건에 이른다.
사실 중국이 단독 등재를 신청하려 하자 각국 자료를 모아 공동신청을 권유한 것도 유네스코다. 신청자격은 물론 ‘유산의 진정성’ ‘독창적이고 비대체적 유산’ ‘세계적 관점에서 유산이 가지는 중요성’ 같은 등재기준도 충족했다. 등재와 관련한 의사결정을 하는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가 1차 심사를 하면서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자료”라는 평가까지 했다.
그럼에도 IAC는 최종적으로 ‘대화를 위해 등재 보류 권고’(Recommended for postponement pending dialogue)를 결정했다. 일본 정부가 등재를 반대하니 대화를 통해 합의를 할 때까지 ‘보류’하겠다는 의미다. IAC는 이 결정의 근거로 유네스코의 새 규정을 꼽았다. 관계국 간 견해가 대립할 경우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심사를 보류한다는 규정이다.
그런데 이 규정은 불과 15일 전에 만들어졌다. 지난달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집행위원회에서다. 당시 새 규정의 적용시점은 2018년부터로 이미 심사 중인 위안부 기록물은 예외라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전격적으로 이번에 적용됐다. 사실 이 규정도 유네스코가 일본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일본은 중국이 신청한 ‘난징대학살 기록물’이 2015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자 유네스코 분담금 납부를 거부하면서 심사방법 변경을 요구해왔다. 지난달 새 규정이 만들어지자 국제사회에서 재정에 시달리던 유네스코가 일본의 압박에 두 손을 들었다는 평가가 나온 배경이다. 유네스코에 일본은 예산의 9.67%를 담당하는 세계 두번째 후원국이자 회원국이다. 22.00%를 맡던 미국이 지난달 탈퇴하면서 일본은 이제 최대 후원국이 됐다(중국은 7.92%로 3위, 한국은 2.03%를 담당해 13위다).
일본이 돈을 무기로 가난한 유네스코를 압박한다는 것은 국제사회에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일본의 후원금을 받고자 규정을 만들어 적용한 유네스코의 결정은 큰 충격을 준다. 유네스코가 어떤 기구인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항구적인 인류 평화는 결국 지적·도덕적 연대 위에 교육과 과학·문화의 국제적 협력활성화로 이뤄질 수 있다는 취지에 따라 1945년 출범했다. 190여개 나라가 정회원국인 대표적 국제다자기구다.
무엇보다 유네스코는 인류 공동의 자산인 문화유산의 보호·보존에 큰 역할을 해왔다. ‘세계유산’ 등재 사업을 통해 문화유산·자연유산·복합유산을 지정, 문화재의 중요성을 국제사회에 각인시켰다. ‘인류무형문화유산’이나 ‘세계기록유산’ 등재 활동으로 의례·언어 같은 무형유산과 기록유산의 의미를 깨닫게 했다. 전쟁·분쟁 지역의 문화재 보호를 위한 갖가지 활동도 벌였다.
특히 문화의 획일화, 상업화가 세계적으로 급속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유네스코는 각국이 지닌 고유한 문화의 가치를 강조했다. 문화다양성이 지니는 의미, 그 중요성을 세계에 비로소 인식시킨 것이다.
유네스코의 재정적 어려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네스코가 그동안 해온 활동, 쌓은 신뢰와 명성으로 볼 때 돈에 휘둘렸다는 사실은 참 안타깝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체제 심화로 경제적 패권, 돈의 힘이 더 세지고 있다. 그 어떤 인류보편적 가치나 이상보다 돈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실정 아닌가. 유네스코의 역할과 활동이 더 중요한 시점이란 의미다. 그런데 유네스코마저 이런 결정을 하다니…. 돈의 위력을 새삼 씁쓸하게 실감한다. 유네스코이기에 더 그렇다.
<도재기 국제·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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