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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모유나 분유를 떼고 처음 먹는 첫 이유식은 대개 쌀미음이다. 쌀미음은 불린 쌀에 10배 정도의 물을 부어 희멀겋게 쑨다. 그러다 아기가 죽 좀 먹고 진밥 먹다 되직한 밥에 반찬 얹어 먹기 시작할 때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돌 즈음이다. 직립보행과 밥 먹는 때가 맞아떨어진다.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은 밥 먹는 것으로 나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생이 끝나갈 때 마지막 입에 떠 넣는 음식도 미음인 경우가 많다. 조부모도 어머니도 그렇게 미음 몇 술 뜨고 영원히 숟가락을 놓으셨다. 

그런데 이 미음을 앞에 두고 우는 남자 어른을 보았다. 콜텍 노동자 임재춘씨다.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다. 그는 사측의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사과와 복직 등을 요구하며 서울 등촌동 콜텍 본사 앞에서 42일간 단식농성을 해왔다. 그리고 지난 22일 마침내 사측과의 협상이 타결되었다. 단식을 풀고 42일 만의 첫 끼니인 미음을 앞에 두고 임재춘씨는 동료들과 함께 울었다. 

타결된 협상의 핵심은 정리해고에 대한 사과 그리고 함께 싸웠던 노동자 3명의 명예 복직이다. 그러나 복직의 형식은 갖추되 한 달 정도 뒤에는 퇴직을 하는 조건이다. 이들의 싸움은 2007년부터 시작됐다. 올해로 13년째 외롭고 고단한 투쟁을 이어온 것이다. 콜텍은 노사 분쟁 최장기 사업장의 기록을 세웠고, 근력 좋던 40대 중반의 노동자들은 이제 늙은 노동자가 되었다. 

콜텍 노사 조인식이 열린 23일 오전 서울 강서구 콜텍 본사 앞에서 이인근 금속노조 콜텍 지회장(오른쪽부터)과 전날까지 42일간 단식한 임재춘 조합원, 올해 60세로 정년을 맞이하는 김경봉 조합원이 마지막 기자회견을 끝내고 꽃다발을 들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콜텍의 재판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근혜 정권의 재판거래 목록에 들어 있었다는 참담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생존을 건 싸움이 고작 싸구려 거래 품목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동안 함께 싸웠던 동료들은 견디지 못하고 떠났고, 긴 싸움에 서로 상처가 남았다.    

언론에서는 ‘극적 타결’이라고 보도했지만 어떤 드라마가 13년이나 질질 끈단 말인가. 그나마 임재춘씨의 단식이 길어지면서 그제야 처음으로 콜텍의 박영호 사장이 교섭장에 나왔고 간신히 협상이 이루어졌다. 복직 투쟁을 시작한 지 4464일 만이다. 13년보다는 좀 더 극적인 말이긴 하다. 그간 이 사안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언론들마저도 이 소식은 다루었다. 뉴스거리 정도는 된다 여겼던 것일까. 어릴 때는 감꽃을 세고 전쟁 통에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었다는 김준태의 시처럼, 굶는 사람의 단식 날수를 세고, 굴뚝 고공농성이 기네스 기록을 경신할 것인지를 세고, 스스로 생을 놓는 노동자들의 머릿수를 세는 것에 너무 무감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1월에는 세계 최장기 굴뚝 농성이냐 아니냐를 셈하던 ‘파인텍’ 노사 협상이 ‘극적 타결’되었다. 굴뚝에 올라가서 단식까지 강행하던 상황이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모두 한시름을 놓았다. 그런데 정말 협상 타결 내용이 잘 준수되고 있는지를 정작 물어본 적이 없다. 

여론에 떠밀려 협상안에 사인을 하고 억지 악수를 한 사장들은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파인텍 상황이 궁금하던 차에 물어보니 여전히 타결 내용 이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카메라 앞에서는 쓴웃음이나마 지었지만 카메라 불이 꺼지면 분장을 지우고 속내를 또 드러내곤 한다. 

콜텍 임재춘씨의 미음이 아직은 멀겋다. 굶은 날수만큼 그는 미음과 죽으로 지내야 한다. 그 시간이 지나 제대로 된 밥이 그의 입으로 들어갈 즈음에는 이 드라마의 극적이고 인간적인 엔딩을 보고 싶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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