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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는 상품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성난 국민들의 목소리에 원희룡 제주지사는 결국 지난 17일 제주도 영리병원 개원 허가를 취소했다. 이미 많은 부문이 민영화, 영리화가 되어 있는 우리나라지만 의료만은 누구나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승리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1800만명이나 되는 우리나라 노동자의 건강을 책임지는 직업보건의료는 공공성을 찾아보기 힘들고 운영이 파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상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가장 잘 알려주는 사례는 무료 야간특수건강검진의 등장이다. 야간특수건강검진은 야간에도 일하는 노동자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고용노동부에서 만든 특수건강검진으로 이미 100만명이 넘는 노동자가 검진을 받고 있다. 여기에 당연히 수가는 정해져 있지만, 대다수가 민간인 특수건강검진 병원의 경쟁으로 인해 수가를 무료로 해주고 대신 끼워 파는 종합검진으로 손실분을 보상하는 병원이 생겨났다. 보건복지부가 관할하는 일반 의료에서는 수가 할인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어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할인을 넘어 무료로 수가를 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무료로 해주는 건강검진은 정상적인 내용으로 진행될 수가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현실에 경악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은 담당부서인 고용노동부에 수가 할인의 불법성에 질의를 했지만, 고용노동부는 명쾌한 답변을 주지 않고 있다. 수가 할인 외에도 영업을 담당하는 브로커들까지 활동하고 있어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은 자신들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건지, 기업에서 근무하는 건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직업보건의료의 비용은 전부 사업주가 부담한다. 그러다보니 사업주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여지가 크고 이는 검사의 신뢰성에도 위협을 주고 있다. 지난 17일 환경부가 서로 짜고 대기오염 측정결과를 조작한 측정업체와 기업들을 적발했다고 발표하자,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의 SNS 단체 방에는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직업보건의료의 가장 기초가 되는 사업장의 위험물질 작업환경 측정조사가 일부 측정기관에서 부실하게 작성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신뢰성도 의심받고 있다. 

병원에서 하는 검사도 다르지 않다. 특수건강검진 시 위험물질이 몸 안에 있는가를 판별하기 위해 소변검사를 시행하고 있고, 이는 보통 작업의 종료시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일부 병원은 이를 철저히 지키고 있는가에 대해 의심받고 있다. 고용노동부에서 이를 감독해야 하지만, 부족한 인원을 이유로 감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몇 년 전에는 모 병원의 소변검사에 문제가 있어 다른 병원 의사가 관련 자료를 고용노동부에 다 넘기고 조사를 촉구했지만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자 산재사망 전문시민단체인 노동건강연대 조사결과에 따르면 하청 노동자의 산재사망은 원청 노동자에 비해 7배나 높다. 하청 노동자의 비극은 직업보건의료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원청 노동자가 직업보건의료의 혜택을 보는 반면, 하청 노동자는 가장 기본적인 건강검진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똑같이 위험물질을 취급하더라도 원청 노동자는 특수건강검진을 받고 하청 노동자는 못 받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답답한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은 원청 담당자에게 호소하지만 원청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하고 사실상 인력 브로커에 가까운 하청 사장은 만날 길도 없다. 산재 사망처럼 이슈화되지도 않아 어디서부터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병원에서 환자 개인만을 상대하는 일반 의사들에 비해 기업을 상대로 을이 된 상태에서 일을 해야 하는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은 자신의 직업적 소명이 실현되지 않는 현실에 남모를 분노와 슬픔을 가슴에 품고 있다. 이 분노와 슬픔이 체념이 되어서는 안된다. 명분 있는 일이라면 국민에게 호소하고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 직업환경의학 의사들과 국민들의 생각은 같다. ‘의료는 상품이 아니다.’

<김철주 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환경의학과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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