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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피었다 지고 4월 넷째 주가 되면 대부분의 대학교가 중간고사 기간을 맞는다. 학생들은 강의에서 빠뜨렸을지 모르는 내용을 보충하고 확인하며 시험에 대비한다. 위태로운 취업전선에서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다 챙겨두어야 한다.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학점 관리는 필수다. 

“노트 좀 빌려 줘.”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친구들 사이에서 빈번히 오가던 말이다. 하지만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흔히 오가는 부탁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생소했었다. “녹음파일 좀 보내줘.”

그렇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강의내용을 녹음한다. 교수자들 중에도 이 사실을 아직 모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허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허용하지 않는다 해도 강의를 녹음하지 못하게 하기는 어렵다. 모든 학생들이 화면만 누르면 녹음이 되는 기계를 휴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학생들은 수업 중에도 휴대전화를 쥐고 있거나 책상 위에 놓고 있다. 태블릿 또는 노트북 컴퓨터를 펼쳐두는 경우도 많다. 그 장치들로 필기도 하고 전자텍스트로 된 책을 보기도 하지만 녹음도 쉽게 할 수 있다. 수업 중에 자료로 제시되는 사진이나 슬라이드 등의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기도 한다. 

애플사의 스마트폰이 등장한 게 12년 전이다. 스무 살 대학생들은 취학연령 무렵부터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를 벗삼아 세상을 익혔을 것이며 그것을 가지고 서로 소통하는 데 익숙할 것이다. ‘인강’으로 수능 공부를 했고 책보다 유튜브를 좋아하는 그들이 필기보다 녹음파일을 만들어 다시 듣기를 선호한다 해도 썩 이상할 것은 없다. 

대학에서도 디지털 매체를 통한 세계와의 접속을 생활화한 학생들과 전통적인 강의 방식 사이의 간극을 알기에 변화하는 매체 문화를 활용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강의 영상을 제공하면서 토론을 위해서만 강의실에 출석하는 수업도 개설되고, 블랙보드라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여러 활동을 수업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강의실에서 책을 붙들고 씨름을 하며 설명도 하고 대화도 하는 ‘구식’ 수업도 여전히 있다. 

전통적인 강의의 미덕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상호존중과 합의를 말하려는 것이다. 첫 시간에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설명하면서 나는 내 동의 없이 강의를 녹음하지는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굳이 동의를 구하러 오는 학생은 없다. 그러면 아무도 녹음을 하지 않고 있을까? 교수자의 동의 없이 강의를 녹음해도 괜찮은가? 아니면 그건 애당초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인가? 통신비밀보호법상 위법으로 규정하기 어려우므로 문제될 것이 없는가? 강의 내용은 교수자의 것인가, 등록금을 낸 학생의 것인가, 강의 환경을 제공한 대학의 것인가? 

영국 리즈 대학교 등 외국의 일부 대학에서는 강의실에 녹화시설을 설치하고 대부분의 수업을 디지털 영상자료로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머지않은 우리 미래에도 강의는 대학의 소유물로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정보화되고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런 제도적 합의가 공식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인 녹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그것이 문제가 아닌지 따져볼 필요는 있다. 녹음파일을 혼자 사용하거나 결석한 친구와 공유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거래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는 이야기마저 들려오니 더욱 그렇다. 

게다가 녹음은 강의실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행정실에 졸업요건을 문의하거나 교수에게 성적 관련 면담을 하러 오는 학생들이 녹음부터 하는 경우도 있다. 사회생활의 일상적 갈등에서도 녹음파일이 등장한다. 다툼의 여지에 대한 대비로 대화를 시작할 때, 그 대화의 성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역시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괜찮은가? 위법 여부를 우리 사회적 행위의 적절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삼는 건 괜찮은가? 부당한 피해에 대비해 너도나도 녹취부터 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라는 개념은 매체교육 또는 매체 문식력(文識力)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여태까지 매체 문식력에 대한 교육적 관심이 매체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고 어떻게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서 학습을 효율화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왔다면, 이제는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는 윤리를 체계적으로, 다원적으로 교육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사진이든 녹음이든 메신저나 기타 SNS든, 타인을 연루하는 행위의 함의를 깊이 생각하고, 상호존중과 합의를 나의 필요만큼이나 고려하는 윤리가 매체 문화의 근간으로 자리 잡게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 바탕이 없을 때 디지털 매체들이 어떤 폭력의 수단이 될 수 있는지 날마다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윤조원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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