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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이란 용어가 널리 쓰이는 데에서 볼 수 있듯이 사적인 감정이 교환가치를 갖는 시대다. 사람들은 웃음과 친절에는 헤퍼지는 반면, 부끄러움의 감정과 연관된 사과 행위에는 점점 더 인색해진다. 사과 행위는 종종 물질적 보상에 대한 책임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동차사고가 나면 일단 상대에게 목소리부터 높여야 한다는 게 이 사회의 격률이 된 지 오래다. 요즘에는 그조차도 감정 낭비일 뿐, 차분하게 보험사에 전화하는 것이 세련된 해법이 되었다. 사과가 필요하다면 모든 문제가 정리된 후에 보험사에서 대신 해주는 것이다. 물론 그 사과의 형식은 보상금 지불이다.

사람들은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과에 피상적으로는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서비스센터 감정노동자들의 의례적 사과가 그렇듯, 그것은 감성적 주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실질적 사과 행위가 아니다. 수년 전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나섰던 어느 유력 후보는 막바지 선거유세장에서 비장한 사과의 말을 공개적으로 남겼다. ‘교육감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친딸의 SNS 폭로로 지지율이 폭락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가 한 손을 높이 치켜들면서 비명을 지르듯 “못난 애비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을 때, 그 과장된 제스처와 목소리로 표현된 작위적 메시지는 대중들에게 수많은 패러디 작품들을 만들게 하는 영감을 주었다. 그 가운데에는 그의 음성이 절묘하게 편집되어 헤비메탈 기타 반주와 결합된 음악작품, 일명 ‘애비메탈’도 있었는데, 사과라는 표피적 행위 속에 감춰진 모종의 분노와 격정을 풍자적으로 드러냈다.

정치적·경제적 이해득실에 따라 공적 무대에서 연출되는 사과라는 게 대개 이런 ‘애비메탈’ 수준을 넘지 못한다. 최근 동아시아 정치계를 뒤흔들기까지 한 대만 출신 K팝 걸그룹 멤버 쯔위의 대만 국기 사건에 대한 소속사 대표 명의의 홈페이지 사과문도 그랬다. 그에 곁들여진, 화장기 없이 수수한 학생 복장으로 묵묵히 반성문을 읽는 쯔위의 사과 동영상도. 소속사 대표는 “못난 애비…” 수준의 사과(“쯔위의 부모님을 대신하여 잘 가르치지 못한 저” 운운)를 중국인들을 향해 국제적으로 행한 셈이다. 그 사과는 ‘중국 활동 잠정 중지’로 인한 기회비용을 보상금 형태로 지불하면서 ‘불가역적’ 해결이기를 요구하는 표정 없는 제스처일 뿐이었다.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_경향DB

쯔위의 사과가 소속사에 의해 강제된, 사실상 하지 말았어야 할 사과라면, 했어야 하는데 끝내 하지 않은 사과도 있다. 지난 연말 정식 사퇴를 선언하고 프랑스로 떠난 정명훈 서울시향 전 감독의 경우다. 마지막 공연에서 관객들에게 눈물의 호소문을 전한 서울시향 단원들을 포함하여 정 전 감독이 박현정 전 대표의 정치적 물타기 전략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이 있지만, 정 전 감독 가족에 대한 서울시향의 편법적 특혜 논란으로 그간의 악화된 여론이 최근 그의 부인의 사건개입 정황이 밝혀지면서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식의 결말은 정명훈 정도의 거장 음악가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임에 분명하지만, 단원들에게 쓴 공개편지를 통해 그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나아가 한국사회 전체에 던지고(“문명화된 사회에서 용인되는 수준을 훨씬 넘은 박해” 운운) 홀연히 외국으로 사라져간 그의 뒷모습은 결코 아름다운 여운을 남기지 못했다.

타자에 대한 배려와 성찰,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적 소통이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사과 행위는 예술을 닮았다. 정치인은 지지층의 움직임에만, K팝 기획사 대표는 영향력 있는 글로벌 시장의 동향에만, 시립교향악단의 예술감독은 자신을 추종하는 음악인들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사과 여부를 약삭빠르게 저울질했다.

결국, 그의 가족이 아닌, 중국인들이 아닌, 악단 단원들이 아닌, 그렇지만 그들의 권력과 부, 명예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평범한 시민들은 그들로부터 책임감 있는 해명과 사과를 받지 못했다. 당혹감과 모멸감을 얻었을 뿐. 사과하지 않는 사회, 어느덧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일도 받는 일도 모두에게 낯선 탓인지도 모른다.


최유준 | 전남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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