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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하나. 벌써 이십 년 가까이 흘렀지만 생생하게 기억한다. 1996년 세밑에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민주세력 대부분이 거세게 저항했고 해가 바뀌어서도 이 저항은 이어졌다. 이십대 초반이었던 나는 서울 거리를 행진하던 시위대를 자주 볼 수 있었는데 몸이 부르르 떨리던 날카로운 추위 탓에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그 감정을 설명하기란 무척 곤란하지만 아마 내가 종교를 지녔다면 고통받는 선지자를 지켜볼 때의 느낌이라고 표현했을 법한 감정이었다.
추억 둘.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IMF 사태가 터졌다. 군 입대를 앞두었던 나는 친한 후배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스키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해고당한 사람들, 파산한 사람들이 자살하던 시절인데도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낯설었다. 스키장 건물 내부에는 IMF를 살짝 비튼 I’M FINE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희망을 잃지 말자는 식의 제안으로 이해해주기에는 너무나 외설적인 표어였다.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이 두 가지 추억과 관련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로 신한국당이 민중의 거센 저항을 예상했음에도 노동법 날치기를 강행했던 이유는 그만큼 절박해서였다는 점이다. 당시 OECD 가입의 사후조건이 정리해고 등 소위 노동시장 유연화 실현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우리 경제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완벽히 편입하게 되면 받게 될 충격을 알고 있었다는 거다. 거기에는 IMF의 관리를 받게 될 거라는 시나리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사회, 경제에 가해질 충격을 극복할 수단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선택했다. 둘째로 그 시절에 정말 ‘나는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점이다. 재벌들이 그랬다는 건 상식에 속하지만 이 외에도 개인의 파산을 기회 삼아 부동산 투기 세력과 금융자본들이 엄청나게 재산을 불렸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바로 그들 때문에 보통 사람들까지 재테크에 몰두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노동 관계법 개악에 항의 시위하는 전국 민주 노동조합 총연맹 조합원들(1996년)_경향DB
지금까지 언급한 건 나의 추억들이다. 밀란 쿤데라는 추억이란 망각의 부정이 아니라 망각의 한 형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추억에 대한 쿤데라식 표현이 쓸쓸한 이유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필연적으로 망각에 이른다는 생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무리 끔찍했던 사건들일지라도 심지어 세월호 참사와 같은 재난들마저 추억이 되고 결국 망각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표현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과거 혹은 역사가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을 포기하면 된다. 다시 말해 망각이 예정된 과거의 일들을 현재진행형인 삶의 차원으로 옮겨놓을 수만 있다면 무언가를 추억하는 대신 무언가를 실현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 역시 이런 뉘앙스였으리라. 추억하려 하지 말 것. 기억하려 애쓰지 말 것. 대신 지금 이 순간 행동할 것.
박근혜 정권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특히 최근의 연속적인 사건들인 역사교과서 국정화, 위안부협상, 양대지침, 사드배치 등을 징후로 받아들이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할 수 있다. 어떤 저항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들의 절박함에서 우리는 조만간 새로운 재난이 엄습하리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재난을 효과적으로 피하려는 목적으로 또다시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을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나는 외려 민주세력을 향해 말하고 싶다. 저들이 재난을 대비해 노동자, 농민 등을 희생시킬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는 이 시기에 당신들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다가올 재난에서는 재벌과 부도덕한 정권을 희생시켜 민중을 구할 방도를 고심하고 있으리라 믿어도 되겠는지를.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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