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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논문을 쓸 때 처음 <논어>를 읽었다. 한 사나흘 걸렸던가. 읽어치웠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곱씹고 음미할 능력이 내게는 없었다. 십년 만에 다시, 역시 어떤 필요 때문에 <논어>를 뒤적이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르다. 예컨대 ‘계씨(季氏)’편에서 만난 이런 구절은 나를 멈춰 세운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상급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 다음이며, 곤란을 겪고 나서야 배우는 사람이 또 그 다음이다. 곤란을 겪고 나서도 배우지 않는 것은, 백성들이 바로 그러한데, 이는 하급이다.” 요컨대 네 종류의 인간형이 있다는 얘기다.


첫 번째,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 물론 공자님 말씀에서 이 앎의 대상은 ‘도(道)’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언행이 모두 도에 부합한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할 수는 없다. 아시다시피, 도는 길이고, 길은 방법이다. 어느 곳에나 그 분야만의 도가 있을 것이다. 특히 예술분야에서는 출생과 더불어 득도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을 천재라 부르길 즐긴다. 나는 음악의 경우 정말 천재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닐까 가끔 생각하지만 대체로 이 천재론을 불신한다. 천재라 지목된 이의 재능을 고사시키거나 천재가 아닌 이들의 의욕을 꺾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배워서 아는 사람. 다산(茶山)의 주석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학문을 닦는 사람이 바로 이 유형에 속한다. 얼핏 보면,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천재적 재능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고, 어지간한 의지만 있으면 될 것도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선생님은 50을 넘겨 당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스승을 찾아다닌다. 천재도 아니면서 나는 왜 이것도 못하고 있는가. 또 다른 어느 선생님의 말마따나, 열정도 재능이기 때문이다. 고갈되지 않는 열정은 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세 번째, 곤란을 겪고 나서야 배우는 사람. 열정이라는 재능조차 없는 이가 배움의 길로 나서기 위해서는 다른 자극이 필요하다. 공자는 그것을 ‘곤(困)’이라 했다. 아시다시피 이 글자는 부족함, 난처함, 위태로움 등을 뜻한다. 목이 말라야 우물을 파는 자는 늘 한 발 늦은 것이다. 우물을 파는 동안에 타는 목마름을 느껴야 하니까. 1번(生而知之者), 2번(學而知之者), 3번(困而學之者)에 붙여진 이름을 비교해 보면 마치 맨 앞의 글자가 각 존재 양식의 본질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1번이 사는 중이고 2번이 공부 중일 때, 이 3번은 자주 곤란 속에 있다.


네 번째, 곤란을 겪고 나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 이쯤에서 우리는 생각한다. ‘내 비록 태어나면서부터 도를 알지는 못하였지만, 또 꾸준히 배움에 힘썼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곤란을 겪고 나서는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공자가 우리의 이런 속생각을 예측하고 바로 이런 말을 하기 위해 이 모든 인간유형론을 고안한 게 아닐까 상상해 본다. ‘너는 네 생각과는 달리 3번이 아니라 4번이다. 네 자신이 3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끝내 4번인 것이다.’ 나는 내 시행착오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납득했다.


(경향DB)


덧붙이자. 네 유형을 다시 양분할 수 있다. 2번과 3번은 자의든 타의든 배우려는 사람들이니 가르침이 가능하다. 그러나 1번과 4번은 가르칠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이는 가르칠 ‘필요’가 없고, 곤란을 겪고도 배우지 않는 이는 가르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양화(陽貨)’편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은 변화시킬 수 없다.” 최악의 경우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믿고 변화를 거부할 때일 것이다. 그만큼 곤란을 겪었으면 이젠 배워서 변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의 인사 정책 말이다.


신형철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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