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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큼 무식하고 용감하게 로마자를 학대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정한 로마자 표기법이 있지만, 로마자를 가져다 쓰는 법은 제각각이다. 지명이나 기관명 등 공공영역에서 관할하는 표기는 엄격하게 규칙을 지키고 있지만, 각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로 넘어가면 ‘식민스럽기’ 짝이 없다. 김씨는 킴(Kim)씨로 돌변하고, 박씨는 파크(Park), 이씨는 리(Lee), 전씨는 춘(Chun), 최씨는 초이(Choi)로 둔갑한다. 김준기를 ‘Gim Jungi’로 표기하면 ‘짐준지’로 읽어버리는 왜곡된 로마자 인식은 일제가 종용했던 창씨개명을 떠올릴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다.

문자는 공동체가 약속한 고유한 규칙이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에 있어 대한민국은 문자공동체로서의 면모가 현격히 떨어지는 미성숙한 국가다. 해방 후 나라를 세운 지 이제 겨우 70년 지난 신생 국가의 한계다. 일본과 중국은 각자의 문자체계에 맞게 로마자를 가져다 쓰는 법을 체계화했다. 한국도 로마자 표기법을 정했지만, 각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 있어서는 태반이 문맹 수준이다.

한글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일은 각자의 취향대로 할 일이 아니라 통일된 문자체계로서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수천년 운운하는 문화국가라고 하지만, 조선의 언어가 중국과 달라 서로 맞지 않아 새로 스물여덟자를 만들어 사람들이 쉽고 편하게 썼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후예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근대를 겪으며 서양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문화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로마자 표기와 영어 표기를 동일시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은 미국이고 미국인이 쓰는 말인 영어를 쓰는 것이 곧 한글의 음운체계를 세계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라는 믿음이다. 한국인 여권에 적힌 로마자 이름 표기의 오류를 지적하면, 미국인 기준에 맞춘 것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한글의 소리값을 외국인들이 알아채도록 알파벳으로 쓰는 것은 영어를 쓰는 게 아니라 로마자를 빌려쓰는 것이다. 세상에는 영미권 외에 훨씬 더 많은 나라들이 로마자를 뿌리로 하는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다.

문화사대주의 관점은 문장이나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의 문화에 맞춰 성과 이름을 뒤바꿔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철수’가 ‘철수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인의 대다수는 ‘마이 네임 이즈 마오 쩌뚱’이라고 한다. ‘쩌뚱 마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일본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모토로 동아시아 질서를 거부하고 서구와 손잡으며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생각 때문인지, 대다수가 ‘하루키 무라카미’라고 한다. 한국인도 절반 이상이 뒤집는다.

자국의 문화를 서구의 잣대에 맞게 왜곡하려 드는 이 습성은 문화식민주의 태도다.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할 줄 모르는 중심주의 사고를 스스로 내면화한 나머지 우리 스스로 문화제국주의의 논리에 발맞추고 있다. 성명의 로마자 표기 오류를 지적하면 어릴 적 멋모르고 적어낸 여권의 로마자 표기를 바꿀 수 없어 그냥 내버려둔다는 이들도 많다. 정부와 국회는 식민주의 청산 차원에서 법제도를 정비하고 정책수단을 동원하고 문화적 굴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원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문화사회로 가는 기본이다. 한국사회의 표준에 관한 인식은 지나치게 느슨하다. 표준이 있은 후에라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상상력이 발동할 수 있다. 문자표기 하나 표준에 따라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원칙과 상식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표준은 공동체의 약속이다. 표준이 없는 사회는 약속을 지킬 수 없고 그만큼 사회적 자본이 취약한 미성숙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로마자 표기를 바르게 하는 것은 문화식민주의를 극복하는 일상의 실천이자 문화적 규칙을 바탕으로 사회적 자본을 키우는 일이다.

김준기 | 미술평론가·예술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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