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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민욱 | 영상설치미술가


결국 TV 하나를 장만하고 말았다. TV도 안 보면서 어떻게 문화와 세상에 대해 쓰겠냐는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좀 보자고 우두커니 화면 앞에 앉아 있자니 빨간 피터가 떠올랐다. 대학시절 연극반을 기웃거릴 적에 보았던 <빠알간 피터의 고백>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자유가 없음을 깨닫고 탈출구나 찾기 위해 인간을 배운 원숭이처럼 나도 ‘정상적인 교양’을 갖추고자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봤다. 추송웅의 눈빛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말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더니 온통 말춤 천지였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냉장고, 은행, 숙취해소음료까지 논스톱으로 흔들리던 엉덩이들, 포개어진 두 손목을 바라보며 얼굴은 점점 더 빨개졌다. 그가 무대 위에서 마신 소주 효과가 몇 백억원이라니 앞으로 노예가 될 광고 목록은 더욱 길어질 것이다. 


 대통령 선거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라서 조만간 특정 캠프 선거 로고송이 되는 수순도 밟겠거니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닌가보다. ‘재미’에 의한 ‘재미’를 위한 ‘재미’로 먹고사는 시대에 국가적 브랜드 선양을 한 가수는 영웅이 되고 열광할 일이지만 그 나라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특정 정치인을 공개 지지하는 일은 그야말로 술 깨는 일이란다. 그렇게 연예인은 정치 밖에 머물러야 하는 사회적 존재라고 요구하는 주장은 철저한 트렌드 파악형 싸이가 우리를 지배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콘서트 정치로 시작한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탄생이 그런 현상의 열망을 설명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꼼꼼한 민심 파악형 무대 스타일로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는 안철수 후보는 어떤 노래를 선거에 활용할까. 지난 선거 로고송들을 돌이켜보면 정치인들이 창작물에 숟가락만 얻는 일은 역으로 술 취하지 않고서는 듣기도 보기도 민망한 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오빠만 믿어’를 ‘명박만 믿어’로 개사해서 ‘경제 살리기’에 꽂힌 유권자의 표심을 붙들었다. ‘오빤 강남 스타일’의 원조 격이라고 해야 하나. 2000년 총선에서 가수 이정현의 ‘바꿔’는 일명 ‘도리도리춤’으로 말 춤 못지않은 위력을 과시했다. 


그래서 미디어 시대에 완곡한 이미지 승부를 걸어야 하는 정치인들은 B급 정서의 귀재들로 비쳐진다. 시간과 돈 안 들이며 장소성을 활용하고 싸고 빠르게 상징을 조립한다. 그들은 빨간 피터처럼 소통을 위해 가장 먼저 악수하는 법부터 배우고 인간이 되는 출구를 찾기 위해 닥치는 대로 배웠다고 보고한다. 


빨간 피터는 동물원이나 무대 위로 향하는 출구만 있다는 것을 아는, ‘뭘 좀 아는 원숭이’였다. 그래서 인간들이 말하는 자유라는 것을 선택하지 않으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무대 위로 나가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쓰게 되는 ‘사상이 울퉁불퉁한 원숭이’다. 그렇게 술병을 빨고 ‘헬로’를 외치며 무대를 완성시키는 싸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TV 앞에서 반쯤은 누운 채로 반쯤은 관찰하면서 ‘저것도 인간의 자유로구나’ 독백을 할 무렵 빨간 현수막이 화면 속으로 자꾸 헤집고 들어왔다가 빠지기를 반복한다. 이 암컷 침팬지의 눈에 처음부터 부유하던 것이었다. 


유명자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지부장 (경향신문DB)


바로 재능교육 투쟁 현수막이었다. 해고자들이 1700일 넘도록 출구 없는 투쟁을 하고 있는 사옥 앞 현수막이었다. 그걸 피해서 중계하려 해도 자꾸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니까 카메라는 부유하듯 파노라마를 반복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화면을 핥아대는 파노라마 촬영을 별로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그건 언제나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또 다른 감시의 시선이다. 


B급 정서란 억압된 정서의 결집을 일으키고 비주류를 대변하는 것이라며 카니발을 중계했던 기자 분들, 어떻게 하면 그런 건 침묵하도록 안 볼 수 있는 방법을 배우셨나요싸이 보고 그 소수자들 목소리 좀 들리게 해달라고 부탁 좀 해주세요싸이는 ‘갈 데까지 가보는 그런 사랑스러운 싸나이’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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