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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행 보잉 727 여객기가 갑자기 레바논 베이루트로 항로를 변경한다. 153명을 태운 비행기는 레바논 시아파 단체에 피습당한다. 1명의 미국인 희생자를 제외한 39명의 탑승객은 무려 17일간에 걸친 인질극에 시달린다. 때는 1985년. 레이건 대통령이 미국 제일주의를 외치던 냉전시대였다. 그는 이 사건의 해결사로 영화주인공 람보를 부르겠다고 일갈한다.  

신자유주의를 맹신하는 레이건은 <람보>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 배우 출신치고는 평범한 문화취향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베트남전에 투입된 그린베레 출신의 존 람보. 주연 실베스터 스탤론과 동갑인 1947년생 람보는 독일계 미국인 어머니와 나바호 인디언의 후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전쟁을 마치고 전우가 산다는 마을로 향하지만 정작 람보를 기다리는 건 차별과 냉대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람보는 자신의 상사 트로트먼 대령의 회유 끝에 자수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작품은 경찰과 대치하던 람보가 자살하는 내용을 넣었다가 예비시사회 당시 반대의견이 등장하여 결말 부분을 수정한다. 만일 소설원작대로 개봉했더라면 람보는 레이건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람보는 자신은 이제 주차장 안내원으로도 취직할 수 없는 존재라고 자책한다. 영화에서 1명 사망. 

<람보>가 명분 없는 전쟁에 관한 오마주였다면 속편 <람보2>는 미국 패권주의의 홍보영화로 둔갑한다. 수감 중이던 람보는 베트남에 억류 중인 미국인 포로를 구출하는 조건으로 가석방된다. 람보는 58명을 사살하면서 살인본능을 뽐내는 미국 영웅으로 재탄생한다. 인질구출 작전이 CIA의 공작임을 뒤늦게 알아차린 람보. 그는 자신이 국가를 사랑하는 만큼 국가도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경고한다.

20세기 말 미국의 패권주의는 1980년부터 1992년까지 탄탄대로를 질주한다. 그 중심에는 레이건과 부시라는 호전적인 인물이 버티고 있었다. 레이건은 1982년대 영국 하원연설에서 아우슈비츠와 캄보디아 사태를 비난한다. 그동안 미국이 남미국가에 저지른 정치공작과 테러지원은 연설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부시 부자가 대를 이어 저지른 침략전쟁의 역사도 이에 못지않다. 1988년에 등장한 <람보3>의 배경은 자신의 상사가 억류된 아프가니스탄이다. 이번에는 아프가니스탄에 거주한 소련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람보가 나타난다. 록키시리즈에 이어 람보시리즈로 돈방석에 앉은 실베스터 스탤론은 인터뷰에서 자신은 좌도 우도 아닌 미국을 사랑하는 시민이라고 발언한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연기에 충실하겠다는 태도였다. 소련군과 싸우는 람보는 78명을 살해한다. 트로트먼 대령은 람보에게 너는 미국정권이 전사로 만든 게 아니라 전사로 태어났다고 칭찬한다. 살인병기의 탄생 원인을 개인으로 귀착시키겠다는 시나리오다. 마지막 자막 내용 역시 인상적이다. ‘이 영화를 용감한 아프가니스탄인에게 바칩니다.’ 지금은 미국의 주적으로 추락한 민족에 대한 정치적 배려였다. 이 영화는 기네스북에서 가장 잔인한 영화로 기록된다. <람보4>에서는 무려 83명에 달하는 람보의 희생자가 나온다. 하지만 관객은 더 이상 람보에게 환호하지 않았다. 뻔한 오락영화로 전락한 람보의 무의미한 살상이 사회적 공감대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람보가 사라진 자리에 미국을 상징하는 영웅들이 속속 등장한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외치던 ‘강한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표현만 다를 뿐 트럼프는 레이건과 부시 부자의 정치철학을 빼닮았다.

책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에서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와 정신의학자 27명이 트럼프를 진단한다. 이들은 병적인 자기애, 폭력성, 충동성, 과대망상에 빠진 미국 45대 대통령의 정신상태를 해부한다. 여전히 미국은 람보를 사랑하는 금발의 대통령이 지배한다. 문제는 람보가 상징하는 무한폭력이 미국, 중국, 러시아판 스트롱맨 시대의 창이자 방패라는 점이다. 속편 이후부터 배경화면을 바꾼 람보의 변신은 유죄다. 아드레날린으로 급조한 전투기계의 머릿속에는 무기왕국의 계산서 뭉치만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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