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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작가 닐 게이먼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만이 전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하라고. 말이 쉽지 자신만의 글쓰기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24시간 내로 깔끔하게 매조지하는 것처럼 어려운 과제다. 라틴록의 거장 카를로스 산타나는 어떤 기타를 잡아도 비슷한 소리를 들려준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기타리스트가 산타나처럼 무시무시한 연주력을 토해내기란 불가능하다.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작가의 글을 섭렵하지 않는 이상, 하늘 아래 새로운 글이 존재할까. 그럼에도 쓰는 행위를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거대한 암시이기 때문이다.

허지웅 작가의 신간 <나의 친애하는 적>을 읽었다. 독서를 하다 보면 질투심이 치솟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작가 정영문이 그랬고, 마루야마 겐지가 그랬고,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와 에릭 호퍼가 그랬다. 그들은 자신만의 기호를 총동원하여 내 심장과 사고체계를 휘젓고 다녔다. 때로는 준엄한 목소리로, 때로는 절절한 외침으로 다른 세상과 마주하라고 경고했다.

5년 전, 지금은 절판된 그의 <대한민국 표류기>를 읽으면서도 질투심이 칼춤을 추는 경험을 했다. 글쓰는 허지웅도, 방송 건달 허지웅도 일절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글을 접했다. 책장을 넘길 적마다 감탄사가 푹푹 새어 나오더니 종국에는 부끄러움이 앞을 가리더라. 나는 허지웅이 펜을 잡았던 서른 즈음에 어떤 글을 썼나. 당시는 역사와 현실을 거세한 말랑말랑한 글쓰기에 자족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글쓰는 허지웅을 알았고, 독하게 글쓰기에 매진했다.

그의 글쓰기는 친절하지 않다. 독자에게 글을 팔려고 가벼운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 여기서 속임수란 철저하게 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행위다. 일기처럼 비공개 글쓰기는 독자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 못나도 내 글, 잘나도 내 글이다. 내성적이고 방어적인 글쓰기에 속한다. 하지만 공개적인 글쓰기는 다르다. 소통의 범위가 다르고, 공력의 수위가 다르며, 표현의 근거와 논리가 구체적이어야만 한다.

허지웅은 세상과 자신에게 무게 중심을 두고 글을 쓴다. 독자는 그다음이다. 결국 독자는 세상과, 허지웅과, 다시 독자라는 삼중구조를 이해해야만 한다. 여기에 지난한 자기검증의 절차를 추가한다. 따라서 그의 글은 네 겹 이상의 단단한 표피를 두르고 있다. 영화평론도, 일상을 다룬 이야기도 부패했거나, 부패할지 모르는 세상과 자아를 향한 경고음을 쉴 새 없이 울려댄다. 그 번잡함과 솔직함과 무거움을 글자로 풀어내는 건 쉽지 않다. 결국 허지웅은 자신에게 관대하거나 만용을 부릴 줄 모르는 썩 괜찮은 작가임이 분명하다. 단, 그의 소설 <개포동 김갑수씨의 사정>은 논외로 하자. 미안하지만 소설가 허지웅은 아직 멀었으니까.

그는 책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규칙을 지켜도 물에 빠져 죽지 않는다는 걸 다음 세대에게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탈피해야만 비로소 보이는 사회적 책임감이 없이는 감히 표출할 수 없는 문장이다. <나의 친애하는 적>이라. 흥미로운 제목이다. 허지웅은 작가의 말에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자신을 차갑게 경계할 수 있도록 부디 언제까지나 도와달라고. 이처럼 그는 모든 신경세포를 곧추세워 세상의 어두운 지점을 향해 글 무더기를 날린다.

좋은 책은 잠시라도 독자를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는 서릿발 같은 단어와 문장이 시종일관 독자의 옷소매를 움켜쥔다. 그렇게 독자는 책을 통해서 욕망을 내려놓고 주변을 응시하는 법을 학습한다. 나의 친애하는 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이는 다르게 보기의 변형된 모습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실존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간절함이다. 허 작가의 결과물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나의 친애하는 글이기를 바란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악을 읽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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