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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과 사회생활을 연속적으로 꾸려가는 동안 내 의지처가 되어준 산들이 있다. 납작한 나를 굽어보던 그 산의 능선을 죽 이으면 요약된 삶의 궤적을 그릴 수도 있으리라. 하루살이에게도 대체불가능한 저만의 일생이 있을진대 비록 초라하다 해도 나에겐 유일하고 엄숙한 지금까지의 삶이었다. 그러니 그 산의 정상을 밟았다는 말은 함부로 쓰지 말아야겠다. 어쩌면 그 표현은 스스로 내 흔적을 훼손하는 일일지도 모를 테니깐.

늘 그곳에 있으면서 내 정신을 고양시킨 산들은 다음과 같다. 삼봉산, 우룡산, 장산, 관악산, 일자산, 고봉산, 인왕산, 그리고 심학산. 열거한 산들 중에서 딱 하나 못 가본 곳이 있었으니 부산의 동래에 있는 장산이다. 공부밖에 모르도록 내몰렸던 시절. 청마 유치환이 작사한 교가에도 등장하는 산이었다. “우람히 굽이쳐 온 아세아의 거창한 얼이 여기 장산 기름진 벌 끝 그 염원을 이루었나니….”

아마 졸업식도 교가 제창으로 끝났겠지. 지난주 고등학교를 떠난 지 40년 만에 장산에 오르자니 단순한 꽃산행의 흥취를 뛰어넘는 그 어떤 감정이 일어났다. 그저 학교 뒷산인 줄로 알았던 장산이 이리도 큰 산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단순히 높고 넓기만 한 산이 아니었다. 대체 어디에서 이 물을 공급하는지 정상 부근에 큰 습지가 있었다. 그리고 빽빽하게 우거진 억새와 진퍼리새 사이에서 탐스러운 야생화가 나를 불렀다. 물매화였다.

물매화는 이미 여러 번 본 꽃이다. 내 이제껏 이 꽃을 호명하지 않았던 건 장산의 물매화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 뿌리는 가늠할 수 없는 저 흙 속에 있고, 가는 줄기가 홀로 우뚝하게 솟았다. 공중으로 그냥 오르기에는 심심한 듯 심장 같은 잎 하나를 중간에 두고 쭉 뻗어 올랐다. 꽃에서 잎까지의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까지인 듯한 야생화!

산행을 마치고 자갈치로 갔다. 어깨동무하고 교가를 우렁차게 합창했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맑은 소주와 붉은 회. 이제는 거룩해진 옛시절을 끄집어내며 단풍잎 같은 얼굴로 잔을 부딪칠 때마다 추억의 기슭에서 피어난 물매화가 얼비쳤다. 물매화, 범의귀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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