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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발갛게 달아오른 단풍이다. 무언가 모종의 조짐이 일어날 듯 울긋불긋한 색깔이다. 그동안 공중에 숨어 있었던 날카로운 바람들이 찬 기운 몰고 서울로 몰려갔다.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결판을 내겠다는 기세인 듯했다. 오래전 약속에 따라 꽃동무들과 그 바람을 거슬러 간 곳은 경기도 연천의 보개산이었다.

몇 해 전에 본 연천 은대리의 물거미는 지금도 안녕하신가.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집을 짓고 새끼를 낳고 살아가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거미다. 물속에서 물 바깥을 보면 어떤 모습일까. 오늘처럼 이리도 세상의 상식이 물구나무선 적이 또 있을까. 물거미를 직접 보지는 못하고 빠끔빠끔 올라오는 기포를 통해 거미의 근황을 미루어 짐작만 했다.

복자기나무가 유난히 빨간 계곡 입구에 그리 크지 않은 절이 있다. 사찰은 최근에 지은 티가 역력했지만 절의 내력이 발길을 오래 머무르게 했다. “보개산 심원사는 옛 금강산 유점사의 말사로 석대암, 남암, 지장암, 성주암 등 여러 암자를 관할하던 지장도량의 본산이다. 647년(신라 진덕여왕 원년)에 창건되어….” 금강산 유점사라는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흥건해졌다. 환갑을 목전에 둔 내가 생전에 그곳으로 뜻깊은 꽃산행을 할 수 있을까, 무망한 소망을 떠올려보는데 개울 건너편에서 꽃동무가 번쩍 소리를 질렀다. 무언가 큰 소식을 담은 호외를 뿌리는 소년의 목소리 같았다. 좀바위솔이다!

시원을 알 수 없는 저 아득한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공손하게 지나가는 바위 곁에 이끼도 아니고 고사리도 아닌, 일반적인 식물의 형태와 뚜렷이 구분되는 야생화가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다. 그곳에 그것이 없다면 그 자리는 필시 텅 빈 구멍이었을 것이다! 흙 한줌 없는 곳일지라도 꽃과 바위는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자연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하도 대견하고 엄숙하고 고마워서 바투 코를 대고 킁킁거려 보지만 아무런 냄새나 향기조차 없다. 여보게, 이 바위에서 연원하는 이 깊은 침묵의 뿌리를 한번 즐겨보시게. 따끔하게 충고하는 듯한  좀바위솔. 돌나물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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