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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그리고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서 주장하는 모든 말은 항상 ‘논란’이나 ‘잡음’으로 취급되어 왔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재가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사회가 아니라는 말, 보편적이라는 표현 속에 담긴 배제와 차별을 거론하는 말을 ‘잡음’으로 취급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특정 집단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최근 몇 주간 유례없는 빈도수로 한국 언론이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기사에 올려왔는데, 그 결과 예외 없이 페미니즘은 ‘잡음’이 되어가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배우 유아인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상에서 했던 발언이었다. 페미니스트가 연일 검색어 상위권 순위에 올랐고, 상당수의 커뮤니티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공간에서 유아인의 발언과 이에 대한 반론, 변론, 보도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논쟁 소재가 되었다. 그의 발언에 대해 새삼스럽게 갑론을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결국 이 논쟁 이후에, 여성과 소수자가 경험했던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 단지 피해의식일 뿐이라고 규정되었고, 창작물에 대해 윤리적 재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검열이라는 낙인 속에 지워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참담한 결과는 힙합 분야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났다. 힙합 분야에서 꾸준히 성차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비하 표현 문제를 제기해 온 레이블 데이즈 얼라이브에 대해 힙합 커뮤니티 수용자들은 이들을 ‘가짜’ 페미니즘을 하는 자들로 규정했다. 레이블 VMC는 이제까지 행해진 한국 힙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검열이고 참견이라면서 이제 힙합은 예술의 자유를 더 누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사실 한국 힙합은 혐오 표현 문제로 자주 비판 대상에 올랐다. 이는 창작의 윤리를 다시 한번 재고해 보자는 요청이었다. 이 요청에 생산자와 수용자가 함께 고민하여 답을 낼 기회가 사라진 것 같다. 이제 힙합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모두 검열이며, 특히 ‘테러리즘’에 불과한 ‘가짜’ 페미니즘의 선동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존의 문제제기 자체를 무력화하는 움직임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다. 과거 팟캐스트에서 한 비하, 차별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숙한 바 있는 개그맨 장동민은 코미디를 하려고 해도 무언가를 비하했다는 비판이 심하게 들어와서 코미디를 할 수 없다는 인터뷰를 남겼다. 

하지만 현실에서 무엇을 할 수 없는 자는 다른 자들이다. 특정 여성 커뮤니티에서 활동했고 유아인을 비난했다는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SBS의 한 여성 방송작가가 하차하는 일이 벌어졌다. 비판을 ‘검열’이라고 규정하면서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거나 동조하는 자를 검열하고 배제하는 상황이 된 셈이다.

무언가를 비하했다고 비판해온 것이 맞다. 그리고 그 비판은 우리가 그러한 비하와 차별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다시금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가사를 쓰는 힙합 음악이, 다른 방식의 코미디가 가능한 현재와 미래를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이 비판을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검열로 축소하면서 창작의 윤리에 대한 재고 요청 자체를 문제시하게 되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러한 문제제기와 비판이 검열의 효과, 즉 표현이나 예술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말할 수 있는 자유이지 비판받지 않을 자유가 아니다. 비판을 검열과 동일시하게 되면, 그것을 ‘폭도의 어리석은 행위’로 치부하게 되면, 우리는 창작물의 윤리에 대해 토론할 공간을 잃게 된다.

이렇게 비판이 검열로 등치되는 과정에서 언론 보도가 끼친 해악이 크다. 언론은 이 사건에 대해서 전형적인 경마 저널리즘식 보도 양상을 택했다. 관련된 사람들의 모든 발언을 실시간으로 기사화했다. 사안을 유아인 대 한서희, 유아인 대 의사, 유아인 대 평론가 등 경쟁 구도로 부각시켰다. 누가 누구에게 승리했는가? 항복했는가? 누가 참전했는가?와 같은 전쟁 중계와 같은 보도 방식이 결국은 클릭 수를 늘리기 위한 전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사건을 보도하는 방식은 뉴스 독자들의 댓글을 모으기 위한 자극에 집중되었다. 어서 댓글 전쟁에 참여하라, 누구를 편들고 다른 편을 욕하라, 싸움을 확산시키고 더 많은 댓글을 달라고 독려하는 방식이었다. 원래 편이 나뉘어 있었다고 해도 언론이 편 가르기를 자극하고 극화하여 그것을 수입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논쟁의 핵심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하고 숙의의 장을 마련하는 기사는 적었다. 여전히 페미니즘이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대해서 알기는 어렵다. 그 비판이 검열이라는 누군가의 주장이 중계되었을 뿐이다. 

언론이 공적 책임을 자각하고 있다면, 아직 그런 게 남아있다면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는” 개별 칼럼을 제시하는 것 이상으로 이제까지 진행된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와 그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정리하고 설명하여 논의의 장을 열 수 있는 보도해야 했다. 아무리 온라인 공간이 자신의 말만을 되풀이하는 확증편향의 공간이 되었다고 해도, 오히려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갈수록, 언론은 창작의 윤리와 표현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목소리들을 만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

<김수아 |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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