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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P씨는 흥겨운 보사노바 재즈 공연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곡이 끝나자 피아니스트가 객석을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 감사합니다. 이제 일어나실 시간이군요.

그와 동시에 P씨는 눈을 떴다.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밴드를 벗어 들고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밴드를 사용한 지 이제 사흘째. 그의 인생에서 가장 상쾌한 기상 시간을 맞은 것도 사흘째이다.

밴드 한쪽에는 두께가 2㎜ 정도 되는 작고 납작한 패널이 붙어 있다. 이번에 새로 출시된 알람용 머리밴드 역시 이 에너지팩을 전원으로 쓴다. P씨는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어린애처럼 그 팩을 계속 쓰다듬으며 손에서 놓을 줄을 몰랐다. 이 작은 팩은 지금 전 세계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20세기부터 꾸준히 연구 개발되던 대체에너지, 즉 태양전지, 풍력, 지열, 조력 등은 일부 장점에도 불구하고 비싼 원가, 산업후진국에서는 쉽사리 엄두를 내기 힘든 초기 투자비용, 낮은 에너지효율과 같은 여러 문제가 쉽사리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걸림돌들을 한 달음에 넘어서며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생체전력’이었다.

생체전력이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동식물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전기력을 뜻한다. 그러나 생체전력이 낼 수 있는 에너지는 매우 불안정하고 양도 적었기 때문에, 20세기만 해도 과일에 전극을 꽂아 그 에너지로 전자시계를 가게 하는 정도의 아이들 장난감 같은 물건만 나왔을 뿐이다. 그러나 전자공학과 나노기술의 발달은 모든 전자제품들의 소요전력을 점점 감소시켰다. 그에 더해서 배터리 기술도 발전을 거듭하여 휴대전화는 이제 한 번 충전하면 보름씩 지탱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소형화, 고효율화의 두 방향으로 진화하던 전기전자공학이 어느 순간 생체전력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인류의 에너지혁명은 바로 생체전력, 정확히 말하자면 인체전력의 활용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예전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의 걷고 뛰고 움직이는 활동에서 발생하는 운동에너지를 활용하자는 정도의 차원이었지만,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몸 안에서 항상 발생하고 있는 미세 전기에너지를 축전할 수 있는 에너지팩이 개발된 것이다. 불안정한 인체전력을 일정한 형태로 변환해주는 마이크로인버터의 개발도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생활에 이용되는 거의 대부분의 소형 전자제품들은 별도의 전원이 없이 생체 에너지팩으로 가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국가 전체의 전력발전량에서 무시 못할 비중으로 잉여분이 꾸준히 증가하는 중이다. 물론 에너지팩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또 인체에 부작용이 없다는 점이 완전히 검증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낮은 단가로 대량생산되는 에너지팩은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하나 이상씩 장만하는 데 큰 부담이 없었다. 그야말로 ‘에너지 복지’가 완벽한 실현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인류 문명에 새로운 전환점이 왔다는 사람까지 있었다.

P씨는 출근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동안 천연가스로 움직이는 버스를 이용해왔지만 오늘부터는 새로 개통된 무인경전철을 탄다. 정시에 맞춰 운행되던 버스 노선은 어제를 마지막으로 없어졌다. 천연가스버스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지만 전용도로가 필요하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녹지를 포함한 주변 환경을 강제로 단절시키고 세상을 차도와 차도가 아닌 곳으로 양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사실 이웃들 간에 꽤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승용차 같은 소형차량들은 진작 전기자동차로 바뀐 만큼 버스도 전기용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냐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도로면적을 대폭 줄이고 녹지의 비중을 늘리자는 쪽이 우세했다. 결국 도로는 왕복 2차로만 남기기로 합의가 되었다. 새로 개통된 경전철은 공중에 매달린 채 운행되는 모노레일이다.

전철을 움직이는 전력은 태양열과 풍력 등이 혼합된 다중소스 타입이었다. 전국 각지마다 운행하고 있는 경전철들은 지역맞춤형 에너지 설계가 되어서, 어떤 지역에선 바이오매스에서 얻은 에너지로 발전을 하기도 했고 바다와 인접한 지역 중에는 조력발전으로 전력을 끌어오는 곳도 있었다.

집에서 정거장까지 상쾌한 수풀 내음을 맡으며 걸어간 P씨는 이웃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면서 전철에 올랐다. 그러고는 좌석에 앉아 소리 없이 지나가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언젠가는 숲속의 나무들에게 직접 에너지를 받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옛날 만화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 나무 저 나무를 자기 몸과 연결해서 직접 에너지를 받던 외계인이 있었다. 인간들에게 쫓겨 녹초가 되었던 그 외계인은 그런 방법으로 원기를 차린 다음 자기 별로 돌아갔다.

다른 생물들을 괴롭히지 않고 서로 에너지를 나누어 주고받는 식으로 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에너지 유토피아가 아닐까.

P씨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세상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에너지 혁명의 진짜 모습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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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와 같은 발상은 양날의 검이다. 20세기부터 각종 전기전자 제품을 대량 소비하게 된 인류는 평생 동안 다양한 파장의 전자파에 노출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 영향이 여러 세대에 걸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지 아직 명확하게 결과가 나온 연구도, 데이터도 없다. 아마도 호모사피엔스에 어떤 생물학적 변화, 혹은 환경에 적응한다는 의미에서 진화의 새로운 양상이 나올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런 전자기적 환경이 인류 문명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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