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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트베드(시험장): “일반적으로 과학 이론의 타당성과 적용 가능성을 증명하거나, 기업이나 연구소에서 개발한 각종 신기술 및 시제품의 성능, 효과, 안정성, 양산 가능성, 편의성 등을 시험하기 위한 환경, 공간, 시스템, 설비(시설) 등을 의미한다.” ‘테스트베드’라는 용어를 이렇게 정의하는 <두산백과>는 “한국은 모든 플랫폼과 다양한 기술을 시험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으며,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의 보급률이 높아 세계 IT기술의 테스트베드로 주목받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테스트베드는 새로운 기술이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거치는 곳이다. 미래를 미리 테스트하는 곳이다.

테스트베드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테스트베드, 미래가 가장 바쁘게 미리 돌아가는 곳은 세종시다. 2016년 세종시는 국토교통부의 ‘U-시티 체험형 테스트베드 구축 공모 사업’에 선정되었다. “첨단 유비쿼터스 기술을 기반으로 24시간 가동되는 도시통합운영센터에서 원격으로 다양한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미래형 도시모델”을 테스트하는 사업이다. 시민들에게 언제든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미디어파사드와 미디어보드판이 설치된다고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같은 해 세종시는 두레농업타운에 ‘노지형 스마트팜 실증 테스트베드’를 조성했다. 스마트 환경제어시스템과 관제실을 갖추고서 땅속과 땅 위의 상태를 자동으로 측정하고 판단해서 작물을 재배하는 시험이다. 미래형 농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배우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2017년에는 같은 곳에서 ‘친환경 전기농기계 실증 테스트베드 구축을 위한 사업’을 시연했다. “위성신호를 받아 밭을 가는 자율주행 트랙터, 드론을 이용한 방제작업, 승용관리기 및 전기 다목적 이식기, 여성과 노인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전기 다목적 운반차량” 등이 출동해서 농업 분야 4차 산업혁명이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주었다.

또 세종시는 올해 4월에 자율주행자동차 연구개발을 위한 테스트베드를 구축하겠다고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지역산업 거점기관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앞으로 5년 동안 모두 145억원을 투자한다고 한다. 상용화되기 전에 실제 도로에서 생길 수 있는 안전문제를 꼭 해결해야 하는 자율주행차는 그 어떤 기술보다 테스트베드가 절실히 필요하다. 테스트베드가 클수록, 실제 교통 환경에 가까울수록 자율주행차가 약속하는 미래가 더 가까이 왔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세종시가 자율주행차 테스트베드가 되는 것은 정부가 내세우는 ‘스마트 시티 추진 전략’의 일부이다. 올해 1월 4차 산업혁명 위원회는 세종시 5-1 생활권과 부산 에코델타시티를 ‘스마트 시티 국가 시범도시’로 선정했다. 274만㎡에 이르는 세종시의 스마트 시티는 앞서 열거한 각종 테스트베드를 포괄하는 하나의 거대한 테스트베드인 셈이다. 그 안에는 스마트팜, 스마트 교육시스템, 미세먼지 모니터링, 자율주행 대중교통, 혁신창업 구역, 제로에너지 특화 단지 등이 들어있다. 테스트베드는 말로만 읊을 때는 잘 실감나지 않는 미래 시나리오를 더 그럴듯하게 보이게 한다.

테스트베드에서는 혁신적인 실험을 촉진한다는 명분으로 규제가 쉽게 사라진다. 지난 1월 ‘조선비즈’ 기사는 새 스마트 도시가 ‘탈규제’의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손병석 국토부 1차관은 이 ‘국가 시범도시’를 “백지상태에서 조성하는 신도시”라고 표현했다. 또 여기에는 ‘규제 샌드박스’를 적용한다고도 했다. 아이들이 모래 놀이터에서 마음대로 노는 것처럼,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해서 기업이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마음껏 시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규제혁신 토론회에 참석한 대통령 앞에는 실제로 아이들의 모래 장난 도구가 놓여 있었다.

테스트베드는 혁신가들의 놀이터이자 이상향이다. 간섭 없는 곳에서 마음껏 창의성을 발휘하고 실험해서 미래 세계를 건설할 토대를 만들고자 한다. 가령 곳곳에 센서를 달아 데이터를 최대한 많이 수집하고, 최소의 절차만 거쳐서 자율주행차를 완전 무인 모드로 시험하기를 원한다. 이들에게 테스트베드는 자유와 기회의 땅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새로 등장한 테스트베드 후보지가 바로 북한이다. 남북정상회담 성공 이후 쏟아진 미래 전망 속에서 북한은 갑자기 “스마트 시티 등 4차 산업혁명 시험무대”가 되었다. 지난 16일 열린 ‘아시아 리더십 콘퍼런스’를 보도한 ‘조선비즈’ 기사에서 북한은 ‘IT 원시림’으로 규정되었다. 한 발표자는 “오래전부터 얘기가 됐지만 현실화되지 못한 스마트 시티를 북한의 도시에 구현할 수 있고, 남한에서는 규제 때문에 불가능한 원격 진료나 인공지능 의료 시스템도 북한에서는 가능하다”라며, 북한을 세종시보다 더 크고 깨끗한 ‘백지상태’의 테스트베드로 보았다. 이 백지 혹은 원시림에서 북한 사람들의 존재와 목소리는 지워진다.

세종시든 북한이든, 물리적이고 정치적인 영토의 일부를 테스트베드로 삼고 싶은 이들은 그 공간을 백지, 원시림, 놀이터라고 생각한다. 혁신가들에게는 매력적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섬뜩할 수 있는 비유다. 나의 테스트베드는 타인의 생활세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혁신가들의 미래 전략은 테스트베드를 차츰 늘려서 결국 이 사회 전체를 테스트베드로 만드는 것이다. 테스트베드를 정의하고 확보하고 확대하는 세력이 곧 미래의 주도권을 쥔다.

미래는 테스트베드에 잠복하고 있다. 미래에 개입하려는 사람들은 지금 테스트베드에서 벌어지는 일에 주목해야 한다. 테스트베드는 세계와 동떨어진 무풍지대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상이한 비전과 이해관계가 팽팽하게 경합하는 곳이다. 사람과 역사가 깃들지 않은 완전한 백지란 어디에도 없고, 한반도의 원시림은 이미 사라졌으며, 요즘 부모들은 모래 놀이터가 오염되어 있다고 의심한다. 완벽하게 자유롭고 안전한 놀이는 없다. 우리는 어떤 놀이터에서 미래를 테스트할 것인가?

<전치형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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