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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수수·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23일 처음 법정에 섰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재판이 열린 지 1년 되는 날이었다. 이 전 대통령 재임 중 검찰 수사를 받고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9주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의 얼굴에선 회한의 빛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장문의 입장문을 읽어내려갔으나 부인과 변명뿐이었다. 주권자를 배신한 데 대한, 진심 어린 사죄는 없었다.

뇌물수수와 횡령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23일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해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 전 대통령은 “오늘 비통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며 “검찰의 무리한 증거의 신빙성을 재판부가 검토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의 소송 비용 대납과 관련해서는 “사면을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는 공소 사실은 충격이고 모욕”이라고 주장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라는 국익을 위해 삼성 회장이 아닌 이건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의 사면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다스 비자금 조성·횡령에 대해서도 “형님과 처남이 회사를 만들었고, 30여년간 회사의 성장 과정에서 소유나 경영을 둘러싼 어떤 다툼도 없었는데, 국가가 개입한 게 온당하냐”며 혐의를 부인했다.

이 전 대통령은 주변에서 재판을 거부하라는 주장이 많았지만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그럴 수 없었다”며 법정에 나온 이유를 설명했다. 공판준비절차에서 검찰이 제출한 모든 증거에 동의한 배경을 두고는 “증인 대부분이 금융위기를 극복하고자 밤낮 없이 일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법정에 불러 추궁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둘 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궤변이다. 재판에 출석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피고인의 의무다. 박 전 대통령이 재판을 거부했다고 자신의 출석을 대단한 일로 ‘포장’하는 건 어처구니없다. 증거 동의 사유를 밝힌 대목도 군색하다. 측근들이 등 돌린 상황에서 그들을 법정에 불러내 다퉈봐야 승산 없다고 판단한 것 아닌가. 일부에선 사법절차를 신속히 마무리하고 사면을 기대하려 한다는 관측까지 내놓는 터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증거와 진술이 차고 넘치는데, 언제까지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려 할 참인가. 진실을 숨기려 할수록 죄만 더 커질 뿐이다. 이제라도 법정에서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시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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