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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반격(Backlash)이 과격화되고 있다. 5월19일 혜화동 시위에 가서 여자들에게 염산을 투척하겠다는 게시물(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이 여러 건 올라왔고, 일베의 몇몇 유저가 시위를 훼방 놓으러 갔다가 연행되기도 했다. 요즘 온라인에서는 ‘페미를 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댓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지난주 한 유튜버가 폭로한 사진계 성폭력 사건 수사청원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한 여자연예인의 사형을 요구하는 경악스러운 청원이 올라오기까지 했다.

여자들의 분노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남자들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을까? 그간 누려왔던 가부장제적 특권이 공격받는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일까?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계산속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야말로 ‘뭐가 문젠지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보라’고 얘기해야 할 지경이다. 이들은 대체 무엇으로부터 이렇게 상처를 받은 것일까?

어쩌면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곳은 좀 더 깊은 곳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한국의 ‘일부’ 남자들이 내뱉고 있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환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엄연한 현실로부터 시작된다. 여자와 남자를 불문하고 모든 청년들의 삶이 근 10년간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다는 것은 사회적 사실이다. 여전히 믿기 어렵다면 청년임대주택이나 대학 기숙사를 자신들의 이익(땅값과 임대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는 건물주들이나, 지역 SOC 예산을 900억원가량 증액하고 청년 관련 예산 1000억원을 삭감한 국회를 보면 될 것이다.

당연히 청년들의 삶은 궁핍해지고, 그들의 필요와 욕망 역시 많은 제약 속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젠더질서의 불균형이 성별에 따라 대응방식을 갈라놓았다. 남자들은 ‘여자 탓’을 하며 자신들의 분노를 해소했고, 여자를 성욕해소를 위한 물건처럼 여김으로써 욕망을 해소했으며, 아직은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주어질 ‘조신하고, 살림 잘하고, 내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를 떠받들어 주면서, 맞벌이도 해줄 개념녀’를 꿈꾸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했다. 반면 여자들은 우울함에 빠져드는 와중에도 자력생존을 위해 노력했고, 변화를 위해 싸웠으며, 없는 가운데서도 서로를 도우려 했다. 여자들이 차근차근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미래를 모색하는 동안, 남자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멋대로 만들어놓은 환상 속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을 비난하고, 추행하고, 의존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2015년부터 터져나온 여자들의 분노는 이런 남자들의 환상을 심대하게 위협하고 있다. 때리면 맞기만 하는 줄 알았던 김치녀들에게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것, 불법촬영물 속의 벗은 몸들과 예쁘게 웃기만 하던 여자아이돌에게도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 나를 구질구질한 삶에서 구해줄 것이라 막연히 여기던 여자들은 세상의 불공평함을 모르는 순진한 바보가 아니며, 그런 게임에 놀아날 생각도 없다는 것. 그러므로 남자들의 사회인식과, 포르노와, 미래계획 속의 여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자꾸 일깨우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 인간이라는 사실, 그들과 눈이 마주칠 수 있고 그들 또한 나를 바라본다는 사실이 남자들에게는 공포가 되었다. 남자들은 이 환상의 여자들을 자신의 궁핍과 어려움에 대한 모종의 보상이자 권리처럼 여겨왔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환상을 만들고, 키우고, 공유하며 낄낄거렸다. 나의 힘듦을 알리바이 삼아서, 나보다 더 힘든 처지에 놓인 이들의 얼굴을 외면하고 착취했다.

그리고 오늘 남자들이 받아보고 있는 것은 그 행동들에 대한 인간성의 정산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으로서 물어야 할 죗값의 크기는 커질 것이다. 단언컨대, 어떤 협박이나 폭력도 여자들의 눈을 감게 할 수 없다.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혹은 환상의 세계와 함께 멸망하거나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미 너무 늦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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