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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아폴로 17호가 달에 착륙했다. 1966년 시작된 아폴로 프로그램의 마지막 비행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유인 달 탐사였다.
세 번째 우주비행을 하게 된 유진 서넌 사령관은 월면에 3일 동안 머물며 각종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현재까지 달 표면을 밟은 마지막 인간으로 남아 있고, 이 기록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아폴로 17호는 인류의 집단적 기억에 또 하나의 흔적을 남겼다. 우주 공간에서 찍은 지구의 고화질 사진이었다. ‘블루 마블(푸른 구슬)’이라고 알려진 이 이미지는 누구나 한번쯤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이 사진은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 아득한 우주 공간 속에 외롭게 떠 있는 하나의 작은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밖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지구가 사실상 닫힌 계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인류에게 주어진 자원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생각은 1960년대 후반 이후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끝없는 진보가 가능하다는 믿음에 균열을 냈다. 이와 같은 사고의 전환은 ‘우주선 지구호’가 지속적으로 순항하기 위해 승객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였다. 아폴로 17호가 추진되고 있던 1972년에 출간된 이 보고서는 현재 인류가 심각한 곤경에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인류가 근대 이래 성취한 과학과 기술의 총아인 우주 개발 프로젝트가 역설적으로 과학과 기술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클럽의 회원들은 무엇을 근거로 인류가 곤경에 빠져 있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들은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저명한 컴퓨터 엔지니어인 제이 포레스터와 그의 연구진을 섭외했다.
포레스터는 2차 세계대전 중에 고성능 진공관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한 ‘훨윈드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미 해군의 지원을 받은 이 컴퓨터는 폭격기 조종사를 훈련시키는 모의 비행 장치를 구동하는 데 활용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포레스터는 복잡한 시스템 내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시스템역학’을 창시했다. 컴퓨터 시스템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역학 이론은 이후 경제 시스템, 도시 시스템, 더 나아가 세계 시스템을 분석하는 데까지 응용되었다. 포레스터는 세계 시스템을 하나의 모델로 구현하면 세계 경제, 인구, 생태계 등의 데이터를 입력값으로 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MIT 연구진은 포레스터의 시스템역학 이론을 바탕으로 ‘월드3’이라는 컴퓨터 모델을 구축했다. 이 모델은 식량, 산업, 인구, 비재생 자원, 공해 등 5개의 주요 서브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72년 당시 알려져 있는 데이터를 입력하면, 고성능 컴퓨터가 서브시스템들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고려해 향후 100년간의 추세를 계산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컴퓨터 모의 시험 결과 지구라는 시스템의 ‘성장의 한계’는 2072년 무렵에 도래할 것이며, 이때 “인구와 산업 능력이 갑작스럽고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급감할” 것으로 나타났다. 즉 당시와 같은 수준의 경제 성장이 지속된다면 인류는 100년 안에 거대한 벽에 부딪히리라는 주장이었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여러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대중들의 뇌리에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생생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컴퓨터 모의 시험 또는 ‘시뮬레이션’은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시뮬레이션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시스템이 지나치게 복잡해 그 내부의 작동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MIT 연구진 역시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구축한 모델은, 다른 어떤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과도하게 단순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은 월드3 모델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구라는 복잡계의 작동 방식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모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유용한 모델”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MIT 모델은 그것이 깔고 있는 가정(假定)을 명쾌한 수학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그것을 검증하고 비판할 수 있었다. 로마클럽의 대표단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결과와 그에 바탕을 둔 전문가들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지난 9월21일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 전문이 선조위 홈페이지(www.sic.go.kr)를 통해 공개되었다. 이미 알려져 있듯 이 보고서에는 세월호 침몰 원인을 두 개(‘내인설’과 ‘열린 안’)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위원회의 입장이 두 개로 갈라지게 된 여러 원인 중에는 모의 시험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놓여 있었다.
선조위는 침몰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에 의뢰해 선박의 축소 모형을 제작한 후 사고 당일과 유사한 조건하에서 침몰시키는 시뮬레이션을 수행했다. 이 시험은 월드3 모델과 마찬가지로 실제의 선박에 비해 “불완전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선체의 복잡한 형태와 선체 내외부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우리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유용한 모델”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가정을 검증하고 비판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선조위 종합보고서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유용한 하나의 징검다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선조위 시뮬레이션은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미래를 위한 선택의 준거점을 되기 때문이다.
<최형섭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서울과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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