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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가 페터 슈나이더의 <에두아르트의 귀향>이라는 소설이 있다. 동·서독 통일 얼마 후, 에두아르트는 얼굴도 모르던 조부로부터 동베를린에 있는 거대한 저택을 상속받았다는 연락을 받는다. 당시 미국에서 살고 있던 그는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통일된 고국으로 돌아간다. 통일 덕분에 뜻밖의 한재산을 거머쥐게 되고, 몰랐던 친척들을 다시 만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 같던 에두아르트의 귀향은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게 진행된다. 동베를린으로 간 에두아르트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이제 그의 소유가 된 저택을 점유하고 살고 있는 거주민들의 총탄세례였다. 게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세금도 함께. 이야기는 이제 달콤한 상상이 아니라 복잡하고 냉정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다. 에두아르트가 만나야 할 그 현실이란 것은 단순히 한 저택의 소유권 분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과 서가 서로 갈라져 살았던 세월 동안 각자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삶이며, 그 근저의 역사였다. 그것은 이념이나 체제의 문제 너머의 것이었고, 국가를 넘어 개인의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산가족도 아니고, 북쪽에 어떤 식으로도 연고가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러니 난데없는 상속을 기대할 수도 없지만, 이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이런 상황이 우리와 아주 멀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삶끼리의 조우 말이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에 발표된 이 작가의 인상적인 책이 또 하나 있다.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으로, 아직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이던 시절에 장벽을 뛰어넘어 동서를 오고갔던 일종의 국경 침범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동쪽에서는 국경이라고 주장하던 장벽을 서쪽에서는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국경을 침범한 사람들이란 말이 딱히 맞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그 장벽을 월경하다가 총을 맞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숱하게 있었으니, 어느 쪽에서 보거나 장벽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경계를 뛰어넘는 일이었을 것이다. 동에서 서로만 뛰어넘은 것이 아니다. 서쪽에서 동으로 넘어가기를 수차례 한 끝에 동쪽에 정착을 해버린 사람이 있고, 서쪽으로 10여차례나 건너왔다가 역시 10여차례 꼬박꼬박 동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 이 책은 이 월경자들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0여차례나 서쪽으로 건너왔던 동베를린의 형제 이야기는 특히나 흥미롭다.
그들이 줄을 타고 장벽을 건너 서쪽으로 와서 한 일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고, 그들은 그 영화가 끝나면 또 줄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이 일이 발각되어 그들이 불법월경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그들의 변호사는 그들이 꼬박꼬박 동으로 돌아온 이유가 동에 대한 충성심을 웅변하는 게 아니겠냐고 변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집이니까’ 돌아갔을 것이다.별로 길지 않고, 가독성도 좋은 이 책을 나는 한줄 한줄 시간을 들여 읽는다. 통일 후에 저쪽에서 살던 얼굴도 모르는 조부에게 유산을 상속받는 상상보다 지금 장벽을 뛰어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내게는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탈북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탈북자들이 북의 국경을 넘어 여기까지 오게 된 참혹한 사연들과, 여기, 남쪽에서 정착하는 동안의 뼈아픈 사연들이 있다. 그 사연들은 기획기사로, 특집 르포로, 다큐멘터리 방송으로 소개된다. 그 사연들은 그렇게 소비되면서 시의성을 잃고, 충격도 사라진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 하고, 이미 믿고 있는 것에 보태지는 정보를 선별하여 받아들인다. 가장 사실적인 것을 전달하는 정보 앞에서 기실 그 정보를 수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가장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나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믿고 싶은 것이 있고,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문학은 아마도 약간은 다른 쪽에 있을 것이다. 문학은 사실을 전달하기보다는 사실의 이면을, 그것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시도하는 행위라고 나는 믿는데, 페터 슈나이더의 이 작품을 보면서 더욱 그랬다. 이 작품에서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들은 그들 개인의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뛰어넘을 수밖에 없는 장벽과 시대와 역사의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전한다. 완전히 다른 세월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 옳다 그르다를 떠나 그것이 그냥 삶이어서 살게 되었던 삶, 이쪽에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저쪽의 삶, 저쪽에서는 이쪽이 왜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지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삶, 그것은 정치나 힘이나 경제로 해석되는 문제는 결코 아닐 것이다. 책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난 도무지 이 서쪽 멍청이들과 이 사회민주주의자들과는 더 이상 살 수 없어. 도대체 너희들 어떻게 사는 거야? 지금과 똑같이 아무것도 모른 채 너희들은 나치를 방관했잖아.’
독일과 우리는 다르다. 아마도 많이 다를 것이다. 역사도, 세월도 다르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참 비슷하다. 우리에게도 방관했던 것이 있고, 그로 인해, 앞으로 싸워야 할 것들이 많을 것이다.
책의 또 한 대목을 인용한다.
‘서쪽에 사는 독일인 대부분이 오래전부터 분단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가정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들이 느끼는 분단의 고통이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 느꼈던 강렬한 감정을 애통해하는 연인과 같다. 독일에서 시간은 상처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고통의 느낌을 없애버리는 것 같다.’
얇은 책 한 권을 천천히 읽으며 오늘 우리의 자리를 돌아본다. 저쪽뿐만 아니라 이쪽의 삶까지 포함해, 이해하기 힘든 것을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간들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고통의 느낌마저 사라져버리기 전에.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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