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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삡…삡…삡….” 1957년 10월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지구 궤도에 진입했다. 소련 튜라탐 제5발사장에서 떠오른 스푸트니크는 3주 후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지구 궤도를 돌며 원격 측정(텔레메트리) 신호를 발신했다. 국경을 가리지 않고 머리 위를 떠도는 위성은 당시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인류가 만들어낸 테크놀로지가 지구를 벗어나 우주 공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소련과 냉전 경쟁을 벌이고 있던 미국에서의 반응은 마냥 긍정적일 수만은 없었다. 한편으로는 소련이 지구 궤도에 물체를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의 발사체 기술을 확보했다는 공포감이 만연했다. 스푸트니크 발사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미국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수요 공급, 취업 및 보상”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라고 요청했다. 조사 결과 미국은 소련에 비해 인구 대비 과학기술 인력의 숫자가 뒤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 연방정부는 곧바로 과학기술 인력의 배출을 늘리기 위한 방안을 수립하는 한편, 우주 관련 연구를 가속하기 위해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과 항공우주국(NASA)을 설치했다. 스푸트니크의 발사는 본격적인 냉전 우주 경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 이후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1961년 4월12일 소련의 보스토크 1호는 공군 소령 유리 가가린을 싣고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에 성공해 미국의 자존심에 또 한 차례 상처를 입혔다. 이듬해 9월,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은 케네디 미 대통령은 “우리는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달에 가기로 선택한다!”라고 선언했다. NASA 아폴로 프로그램의 시작이었다.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총 17차례에 걸친 아폴로 임무를 통해 12명의 미국 우주비행사들이 달 표면을 걷게 되었다. 이후 소련의 살류트·미르, 미국의 스카이랩 등 우주정거장을 거쳐 2010년에는 국제우주정거장(ISS)이 건설되었다. 우주정거장까지는 챌린저, 컬럼비아 등 우주왕복선으로 오가게 되었다. 여러 탐사선이 화성에 이미 착륙해 정보 수집 활동을 수행하고 있으며, 올해에는 태양 탐사선 파커가 태양 궤도에 진입해 근접 비행을 하기도 했다.

한국이 우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의 일이지만, 한국인들은 선진국들이 벌이는 우주개발 경쟁에 항상 관심을 갖고 주목했다. 스푸트니크 1호 발사가 성공한 직후 경향신문은 “우주가 마침내 좁아졌다”는 제목의 연재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는 미국 전문가 마틴 카이딘의 말을 인용해 “우주전에 있어서 마지막 승리는 이 지구뿐만 아니라 외계를 정복하는 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소식은 그야말로 대서특필되었다.

경향신문 1969년 7월21일자에도 “달 기원 1년 1월1일”이라는 제하로 두 면에 걸친 특집기사가 실렸는데, 한국 각계각층의 반응이 소개됐다. 반응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 볼 수 있었다. 한편은 한국이라는 지역의 현실을 반영하는 반응이었다. 가정주부 양제희는 “20㎞도 못되는 수원지의 수돗물도 제대로 받지 못해 밤중에 2시간이나 물 받는 고역을 치르는” 입장에서 달착륙이란 “꿈속 이야기”라고 꼬집었다. 정우회(政友會) 국회의원 차형근은 “지금까지의 반생에 짚신에서 달착륙까지 보았으니 나머지 반생에는 또 무슨 신기한 것을 보게 될 것인지 하여간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소감을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보편의 문제와 감성을 건드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천주교 신부 오기선은 “절실한 인구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달나라에 사람이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도 달나라에 가서 교회를 짓고 우주선교사가 되어 포교를 하고 미사를 드리며 그곳에 살고 싶다”라는 희망을 표했다. 이렇듯 1969년의 한국인에게 우주란 자신의 빈한한 삶을 돌아보는 잣대이자, 미래를 향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났지만, 한국은 이제 간신히 우주를 향한 첫발을 떼고 있는 입장이다. 1993년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발사한 이후, 정부는 1996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우주개발 중장기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올해 2월에 발표한 ‘제3차 우주개발 진흥 기본계획’에 따르면 한국은 향후 5년간 우주발사체 기술을 확보하고, 위성기술을 고도화하며, 달 탐사 임무를 중심으로 한 우주 탐사 계획을 시작할 것이다. 2030년대가 되면 한국인이 쏘아올린 발사체로 달 착륙선을 보내 월면 샘플을 채취해 귀환한다는 계획도 잡혀 있다. 이를 위해서 관련 예산을 연차적으로 확대해나가, 현재 10위에 불과한 투자 순위를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체적인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우주개발에 뛰어드는 동기일 것이다. ‘3차 기본계획’에서는 한국의 우주개발 목적을 “실리적인 우주활동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지정학적 위치 등을 고려한 전략기술 획득 측면도 동시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국제사회 기여’ ‘지적 호기심 충족’ ‘인류 거주 영역의 확대’ 등의 논리를 포함한 “포괄적인 우주개발”을 추진하고 있지만, 한국은 우주 부문의 개발도상국으로서 “실리적인 우주활동”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전략이다. 현실적인 고려도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지금까지 인류의 우주개발 역사를 볼 때 실리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우주개발은 반쪽짜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우주는 과학기술 후속 세대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보고로서 훨씬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최형섭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서울과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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