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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마음의 준비

opinionX 2018. 11. 27. 14:52

어릴 때는 울면 많은 것들이 해결되었다. 울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던 시절도 있었다. 사소한 것에도 떼를 쓰고 투정을 부렸다. 툭하면 울어서 울보, 여차하면 떼를 써서 떼보라는 별명을 얻었다. 울어서 솜사탕을 얻고 떼써서 아이스크림을 얻었다. 녹는 것들이 많았다. 녹아서 흘러내리는 것들이 많았다.

암 투병 중인 아빠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시간을 함께한다는 것은,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새겨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산책을 하고 귤을 까먹고 낙엽을 두 장 주워 서로 한 장씩 나눠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성인이 되고 이런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내가 몰랐던 아빠의 새로운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남은 시간이 참으로 귀하다.

얼마 전 허수경 시인의 사십구재가 있었다. 나는 약력 보고를 했는데, 약력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긴 글을 적었다. 더 무색한 것은 한 사람의 삶이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능하다면 수경 누나가 했던 말과 썼던 글들을 밤새 들려주고 싶었다. 사십구재를 마치고 아빠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아빠가 응급실로 옮겨졌다.

주치의가 더 이상의 항암치료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때,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몸과 마음은 한통속이었다. 지지난주까지 나와 근린공원을 산책했던 아빠였다. 20여년 전 얘기를 나누며 그땐 왜 그랬을까 얘기하며 깔깔 웃기도 했다. 얼른 몸을 추슬러 바다를 보러 가자고도 했다. 아빠는 바다를 보면 아득해진다고 했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는 말,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다는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좀체 떠나지 않았다. 구급차를 타고 아빠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 밤, 아빠를 바라보며 아빠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나는 아빠에게 무엇을 얼마나 했을까. 올 한 해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고, 그 무능함을 끝내 외면할 수 없어 슬펐다.

평소에 아빠는 할 것은 다 했느냐고 종종 물으셨다. 채근하거나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가져도 되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할 것에는 할 일뿐만 아니라 할 말, 나아가 할 도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차근차근 할게요, 라고 답하면 아빠는 씩 웃었다. 그래, 나는 네가 내 아들인 게 좋다. 그 말에 얼굴이 벌게져 헛딴데로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요즘 들어 애를 그렇게 쓰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나는 말했어야 했다. 저도 당신이 제 아빠인 게 좋아요. 부자지간이라 쉽게 나오지 않던 말이, 실은 부자지간이라 부러 애써서 해야 할 말이었던 것이다.

아빠에 대해 알 것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사실 또한 나를 슬프게 했다. 긴 시간을 함께해도 몰랐던 것들이, 상대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유심함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자책하다가도, 마음이라는 게 있어서, 그것을 아직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손을 잡았다. 아빠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 온기를 절대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무리 준비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마음일 것이다. 물질적 준비는 차곡차곡 모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적 준비는 상상을 요하는 것이다. 소중한 대상이 떠나고 난 다음 장면은 쉽사리 그려지지 않는다. 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어떤 것이 스르르 빠져나가고 만다.

아버지라고 안 쓰고 아빠라고 쓴다. 아버지라고 안 부르고 아빠라고 부른다. 아빠라고만 부르던 시절, 아빠는 뭐든 해낼 수 있었으니까. 말만 하면 뭐든 만들어냈으니까. 배구도 잘하고 바둑도 잘 두고 당구도 잘 치던 아빠였으니까. 한자와 수학에 능했던 아빠였으니까. 시 쓰는 나를 자랑스러워하던 아빠였으니까.

허수경의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개정판 작가의 말을 읽는다. “사랑한다, 라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아빠에게 사랑한다, 라고 말해야겠다. 잘 사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잘 떠나는 일일 것 같다. 남은 자들에게는 그것이 잘 보내는 일일 거다. 아빠가 한 번이라도 더 웃으실 수 있게 말을 많이 건네야겠다.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해야겠다. 꼭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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