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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22년 전 이맘때였다. 1993년 6월, 때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해 3월 ‘인권운동 사랑방’을 설립해 ‘인권하루소식’을 발간하던 재야 인권운동가 서준식은 김형민·염규홍과 함께 <유서사건 총자료집>이란 제목이 달린 ‘강기훈 백서’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당시 그는 ‘유서사건 강기훈씨 무죄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서울 낙원동에 있던 인권운동사랑방에는 더위를 식혀줄 변변한 선풍기 하나 없었다. 책상에는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세 사람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하는 날이 많았다. 늦은 밤까지 ‘강기훈 백서’에 들어갈 수사기록과 녹취록, 필적 감정자료 등을 보완했다. 그들은 그렇게 1년을 보냈다.

3권으로 구성된 2700여쪽 분량의 <유서사건 총자료집>에는 공판기록, 논고문, 변론요지, 판결문 등 공식 문서는 물론 신문기사 1000여건, 각종 성명서 등이 수록됐다. 유서대필조작사건의 처음과 끝, 거짓과 진실, 국가권력이 짓밟은 20대 청년의 인권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강기훈 백서’였다.

서준식이 <유서사건 총자료집>을 만들기 시작한 때는 강기훈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사망한 김기설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1992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직후였다. 당시 그가 500만원이 넘는 빚을 내가며 ‘강기훈 백서’ 발간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진실이 거짓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준식은 군사정권과 공안검사들이 주도한 ‘희대의 마녀사냥’에 연루돼 ‘죽은 자’와 ‘갇힌 자’로 갈린 두 청년이 겪어야 했던 비극의 시말(始末)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다. 그가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 인권위원장으로 일할 당시 실무자가 없어 사회부장이던 김기설이 보조역을 맡았다.

그들은 속초 동우전문대 정원석 분신사건,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망사건 등 전국 곳곳의 시위 현장을 찾아다녔다. 늦은 밤 숙소에 들면 문건 작성과 자료 분석을 했고, 수첩을 펴놓고 일정을 확인했다. 그런 연유로 서준식은 김기설의 필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민련 총무부장으로 일했던 강기훈의 필적도 마찬가지다. 서준식이 두 청년의 필적을 몰랐다면, 그게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김기설이 분신사망한 지 일주일 만에 강기훈은 동료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죽음으로 몰고간 ‘파렴치범’이 돼 있었다. ‘왜곡(歪曲)열차’에 올라탄 검찰은 폭주를 멈추지 않았다. 검찰은 전민련이 김기설과 강기훈의 필적이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수많은 자료와 증언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언론도 전민련의 주장에는 눈을 감고, 검찰 발표만 받아 쓰며 강기훈을 유서대필자로 몰아가는 데 일조했다. “진실은 오직 하나, 강기훈은 무죄”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서준식이 만든 <유서사건 총자료집>도 진실이 거짓을 이기는 증거로 채택되지 못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재조사(2005년)와 재심 청구(2008년)가 있기 전까지 10여년간 강기훈과 서준식은 세인들에게 잊혀졌다. 지난달 14일 대법원의 재심 무죄판결로 강기훈이 24년 만에 유서대필 혐의를 벗게 됐을 때 서준식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강기훈이 법정에 나오지 않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서준식이 침묵한 까닭도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진실과 정의가 이겼다”는 말을 가장 듣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거짓의 덫’에 걸려들었던 20대 청년은 50대가 됐고, 진실의 힘으로 ‘거짓의 덫’을 벗기려 했던 40대 재야운동가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한국 사회에서 두 사람을 위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강기훈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 회원들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무죄'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출처 : 경향DB)


유서대필조작사건 이후 강기훈은 드레퓌스에 비유됐다. 유대인 출신 프랑스 포병대위 드레퓌스는 1894년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된 지 12년 만에 최고재판소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간첩혐의를 벗고 복직한 뒤 승진도 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를 감옥에 가둔 군부를 향해 “정의·진실·인권옹호”를 외치며 저항했다. 하지만 강기훈이 유서대필자라는 ‘주홍글씨’를 지우는 데는 드레퓌스의 갑절인 24년이 걸렸다.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었지만 한국 사회는 강기훈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드레퓌스에게 ‘나는 고발한다!’는 글로 결백을 주장했던 에밀 졸라가 있었다면 강기훈에겐 ‘백서’를 발간하며 무죄를 입증하려 했던 서준식이 있었다. 프랑스 사회는 에밀 졸라를 ‘진실의 옹호자’로 평가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는 서준식을 기억이나 할까. 22년 전처럼 때이른 무더위가 찾아온 올해 6월, 강기훈은 간암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고, 서준식은 강화도에서 콩 농사를 짓고 있다.


박구재 기획·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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