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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 중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문 대통령은 지난 9일 취임 2주년 대담에서 “장관들, 잘하고 있다. 잘하고 있다면 인사실패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김수현 실장은 지난 10일 ‘당·정·청 회의’에서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정부가 2주년이 아니고 마치 4주년 같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같은 자리에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관료들에 대해 “잠깐만 틈을 주면 엉뚱한 짓들을 한다”고 했다.

공직의 특성상 ‘일 잘하는 장관’과 ‘복지부동하는 관료’는 양립할 수 없다. 관료들이 일을 안 하는데 장관이 열심히 한다고 성과가 날 리도 없고, 일 잘하는 장관 밑에서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공무원은 없다. 대통령은 장관들을 신뢰하고 있는데 정책실장은 부처 공무원들이 정권 말이라도 온 것처럼 제대로 일하지 않는다고 답답해하니 분명 모순이다. 얘기가 맞건 틀리건 관료들이 술렁이는 건 당연하다. “현 정권도 단기 성과에 집착한다” “관료는 손발만 되라니 좋은 정책이 나올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청와대와 여당이 큰소리치는 것 말고 무슨 노력을 했나”는 불만도 있다고 한다.

이낙연 국무총리(오른쪽에서 두번째)와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네번째) 등이 12일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 고위 당·정·청 협의회를 하기에 앞서 참석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관료는 권력을 획득한 정권이 수립한 국정과제들을 법률적·제도적으로 합당하게 실행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까지 청와대는 지시하고, 공무원들은 이를 수행하는 곳이라는 수직적 위계질서가 작동해 온 게 사실이다. 그렇게 운영되는 게 효율적이고, 5년 안에 성과를 내는 방법이라고 여겨졌다.

이 같은 일사불란함이 정책의 효과를 보장할 수 있을까. 노무현 정부 때 마련했던 종합부동산세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종이호랑이’가 됐다. 도리어 시장은 정부 정책에 일단 버텨보자는 내성이 강해졌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절차적으로 무리한 것이라도 BH(청와대) 지시 사항은 어떻게 해서든 달성해야 했다. 그 결과 4대강 사업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감사원 감사 대상이 됐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미르재단도 지원하다 위기를 자초했다.

이제는 이 같은 일방적 지시와 맹목적 시행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말을 안 듣는다고 호통치고 다그쳐봤자 그때뿐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감사장의 한 장면. 교수 출신 의원이 “제가 10년 전부터 가계부채 증가의 심각성을 경고해 왔는데 전혀 개선된 게 없다”며 피감기관을 호되게 질책했다. 질의 시간 대부분 가계부채 증가가 왜 위험한지, 그럼에도 당국의 대책이 미흡해 위험성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계속됐다. 국감이 끝난 뒤 만난 담당 관료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이어진 한마디. “그런데 그렇게 오래전부터 가계부채를 경고해 왔는데, 실제로 문제가 터지지 않으면 그 경고가 틀린 거 아닌가요. 정부가 잘 대처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가계부채 증가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대책 마련이라는 당위성만 좇다보니 정작 경제 현장을 놓쳤다는 지적이었다.

관료들은 어느 직능 집단보다 전문성이 높다. 해외 근무와 유학 등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되는 두뇌 집단이다. 자칫 보신주의로 빠질 수도 있지만 정책 수립과 실행 과정에서 긍정적 효과를 높이고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절차와 과제별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따질 수밖에 없는 보수적인 집단이기도 하다. 그러한 ‘늘공’(늘 공무원인 전문 관료)들에게 ‘어공’(정권 탄생에 기여해 어쩌다 고위직에 오른 전문가)들의 ‘군기 잡기’는 오히려 복지부동(伏地不動)을 부추길 수 있다.

‘늘공’들을 다잡기 위해 문재인 정부뿐 아니라 역대 정권은 대학교수들을 청와대 수석과 내각에 등용했다. 학문적 연구 성과와 전문성으로 국정과제들이 잘 추진되도록 책임을 맡긴 것이다. 김수현 정책실장, 조국 민정수석, 장하성 전 정책실장, 홍장표 전 경제수석 등이 교수 출신이다. 그러나 이제 교수라고 해서 늘공을 뛰어넘는 전문성을 갖췄다고 하기도 힘들다. 교육부가 13일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 와셋(WASET)·오믹스(OMICS) 등 ‘유령 학회’에 참석한 대학교수들이 무더기 적발된 게 대표적이다. 해외 학회 참석 명목으로 국가 지원 연구비를 펑펑 쓰며 부실한 논문으로 연구 실적을 부풀렸다. 그동안 교수들의 연구비 유용, 제자들을 향한 갑질과 성희롱 등 ‘도덕적 해이’도 사회적 문제로 계속 확산되고 있다.

대학교수를 비롯한 상당수 전문가들이 학문적 연구와 다양한 대외 활동을 통해 구축된 지식과 정보를 선거 공약과 정부 정책으로 구현할 기회가 많다. 정당의 정책 개발 능력이 떨어지다보니 선거 때면 정당과 후보들이 전문가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좋은 공약과 국정과제가 저절로 효과적인 정책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이제는 공무원들을 논리적으로 설득시키고, 그들이 혁신과 개혁의 동반자가 되도록 소통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늘공의 무능을 탓한다고 어공이 유능해지는 건 아니다.

<박재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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