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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그러나 통계가 현실을 모두 반영할 수는 없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거짓말에는 세 종류가 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는 유명한 경구가 여전히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통계가 빠진 현실은 체감하기 어렵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자들은 발표되는 각종 통계치를 뒷받침해 줄 사례를 찾지만 적당한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럴 때는 숫자가 갖는 의미만 겨우 담아 지면에 실을 수밖에 없다.

엊그제 보도된 ‘빚으로 마련하는 신혼집’ 통계가 그러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2014년 이후 결혼한 청년세대의 50.2%가 신혼집을 구하려고 대출을 받았다. 집값이 뛰면서 생긴 우울한 그림자다. 월세로 신혼을 시작한 청년세대는 16.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면 1998년 이전 결혼한 부모세대에서는 13.8%에 불과했던 ‘자가’(自家) 신혼부부의 비율도 청년세대에서 34.9%로 최고치였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양극화가 심화된 결과다. 대출로만 집을 구매할 신혼부부는 그리 많지 않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부가 대물림되고 경제적 불평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적합한 사례들을 문재인 정부의 2기 내각 후보자들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어 너무 씁쓸하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을 약속한 정부에서 말이다.

지난 25일 가장 먼저 청문회에 나선 최정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는 1996년 경기 성남 분당구 정자동 아파트를 사서 지난달까지 거주하다 지난달 18일 장녀 부부에게 증여했다. 딸에게 준 그 집에 계속 살면서 월세 160만원의 임대차 계약도 했다. 장관이 될 아버지 덕에 자식들은 집이 생긴 데다 웬만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월급도 부수입으로 얻게 된다. 최 후보자는 분양가의 두 배 가까이 오른 세종시 아파트 분양권과 배우자 명의의 서울 잠실 아파트도 보유하고 있다.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한 부동산 정책 주무부처를 이끄는 자리다. 잠실, 분당, 세종의 ‘똘똘한 3채’로 23억원의 시세차익을 얻는 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공정한 것도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부동산 투기에 대한 용인은 부의 양극화를 방조하겠다는 ‘항복 선언’과도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마치고 취재진의 퇴장을 기다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금 문재인 정부를 향해 ‘소통 부족’을 지적하는 여론이 늘고 있다. 2030세대들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차츰 거두는 것은 “이명박·박근혜 때 교육을 받아서”가 아니다. ‘금수저냐 흙수저냐’로 계급이 갈라지듯 불평등이 부모세대부터 세습되고 있지만 정부 출범 3년차가 되도록 이렇다할 성과는커녕 해법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절한 취업의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데도 부모의 후광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역시 이번 장관 후보자들의 청문회를 장식한다. 지난달 청년(20~29세) 실업률은 9.5%로 모든 연령대 중 가장 높은 상황이다.

조동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의 경우 자신이 이사로 있던 업체의 미국 법인에 장남이 인턴으로 채용됐다. 둘째 아들 역시 조 후보자가 카이스트에 재직하는 기간에 카이스트 위촉기능원으로 6개월간 일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스펙 쌓기를 한 셈이다. 특히 조 후보자는 청와대가 세운 인사검증 7대 원칙 중 성범죄와 음주운전을 제외하고 부동산 투기와 이를 위한 위장전입, 병역특례 등 5가지 분야에서 의혹에 휩싸인 인물이다. 문성혁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의 아들은 낮은 학점과 부실한 자기소개서, 인증기간이 지난 토익점수에도 ‘꿈의 직장’인 한국선급에 채용됐다. 세계해사대(WMU)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인 문 후보자가 2015~2016년 네 차례 한국선급을 공식 방문했는데 그 일정이 아들의 한국선급 채용 시점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의혹도 나왔다. 명절에도 도서관에서 새벽부터 공부하고, 몇십번씩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자기소개서를 완성하는 취업준비생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엄청난 불공정이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수입으로는 힘든 2억원 안팎의 예금액을 형성하는 데 부모의 도움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불린 사람들이 장관으로 지명됐다. 이 때문에 강부자(강남 땅부자) 내각이라는 오명을 썼다. 박근혜 정부 때도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증여세 탈루 의혹에 고위 공직 후보자들이 중도하차했다.

문재인 정부의 인사청문회에서는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2기 내각을 이끌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의혹이 하나둘씩 불거지면서 무엇이 바뀐 것인지 모르겠다. 내 편이면 눈감고 허물도 덮어주려는 여당의 행태는 10년 전과 오십보백보다. 정녕 ‘이런 꼴을 보려고 촛불을 들었나’. 촛불로 탄생한 정부를 향한 한숨 소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박재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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