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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동네 터줏대감이다. 가파른 언덕을 오를 적마다 밭은 숨을 내쉬는 노인 두어 명을 빼면 그가 그 동네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그의 머릿속엔 위도와 경도를 굳이 매겨놓을 필요 없는 정밀한 동네 지도가 구축되어 있다. 그 동네에서만큼은 그가 범지구위성항법시스템보다 우월하다. 그는 동네를 가로지르는 가장 빠른 샛길을 찾아줄 수 있고, 후미진 골목에 신장개업한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은 가게에 대한 세세한 정보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세상에 맛집으로 알려져 한 시간쯤은 기다려야 하는 식당과 맛과 질은 똑같으면서 값도 싸고 줄 설 필요도 없는 실속 있는 맛집 리스트를 갖고 있다.

어느 날 그가 사는 동네는 나들목에 ‘동화 마을’이라는 세움간판이 세워지고, 골목마다 오즈의 마법사, 피노키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선녀와 나무꾼, 토끼와 거북 등 국경을 초월한 인물들이 들어앉았다. 뜻하지 않게 그들과 함께 동화 마을 주민이 된 뒤 그는 더 자주 지인들의 전화를 받아 부지런히 동네 정보를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다. 그 일이야 그한테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동화 마을 주민으로 사는 일은 쉽지 않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날이 좋으면 좁은 골목길에는 사람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그의 집 창문 너머 담벼락에 그려져 있는 토끼 앞에는 ‘인생샷’을 남기려는 사람들로 소란스럽다. 그는 집에 있는 날이면 온종일 창문 앞에서 서성대는 사람들의 다리를 바라봐야 한다. 때때로 호기심 많은 사람은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들은 그 방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와 마주 앉아 빵조각을 먹거나, 밥상을 차리는 우렁각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가 낯선 이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그럴 때마다 그는 도리어 자기가 미안하다고 한다. 동화 마을에 산다면 좀 동화스러워 하는데 그럴 수 없는 게 안타깝다나. 

아무튼 그 터줏대감은 무던하게 동화 마을에 동화되어 살고 있다. 그래도 사람들이 동화 마을에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오래전 남쪽 어느 벽화 마을에 갔다가 담장 너머를 힐끔거렸던 나는 무안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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