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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00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기념사를 둘러싸고 말이 많다. 그래서 나도 전문을 읽어 보았다. 전체로 보아 흠 잡을 곳이 별로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어떤 내용이 문제가 되었던가. 해방 후 ‘반민특위’를 통해 우리 안의 일제잔재를 청산하려는 노력이 ‘빨갱이’의 분열책동으로 부당하게 몰려 탄압받았다는 사실을 두고 시비는 시작되었다. 반민특위가 오히려 국민을 분열시켰다는 논리는 현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정치공세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역사인식마저 팽개쳤기 때문에 ‘토착왜구’라는 거친 비난의 소리도 듣게 되었다.

실패한 일제잔재청산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종종 반면교사인 프랑스의 예를 들게 된다.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기간에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프랑스인, 이른바 ‘콜라보’라 불린 부역자 1만여명이 처형되었다. 1차 세계대전 시 독일군과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비시’ 정부의 수장으로서 나치와 협력했던 페탕도 사형선고를 받았다. 고령 때문에 후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4년여의 점령기간에 이렇게 많은 프랑스인 나치부역자가 생겼는데 한 세대 넘게 우리 땅을 강점했던 일제의 지배 아래서 그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조선인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과연 이들 가운데 누가 합당한 처벌을 받았는가. 이들의 자손들은 대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나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아야만 했는가. 여기서 나는 장준하 선생의 기구한 가족사를 떠올리게 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시작하지도 못하고 좌절된 우리 안의 일제잔재청산 문제는 북핵 문제를 빌미로 이제 다시 면죄부를 받고 있다.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해치는 행위는 북한만 이롭게 한다는 게 논리의 핵심이다. 문제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가 나치잔재청산을 단행했던 프랑스는 후에 당당하게 독일과 함께 유럽통합의 길에 나설 수 있었다.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이른바 ‘정상국가’가 되기 위해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오늘의 일본이 있기까지는 바로 우리 안의 일제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앞으로 좀 더 지속된다면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와 일장기를 흔드는 부대가 서울거리에 나타날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지금은 조금 잠잠해졌지만 이른바 ‘뉴라이트’가 지핀 역사교과서 논쟁이 있다. ‘자학사관(自虐史觀)’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일본 극우세력의 논리를 우리 땅에 그대로 옮긴 이들은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투쟁했던 임시정부의 정통성 대신 8·15를 ‘건국절’로 삼아야 한다는 논지도 폈다. 역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하려는 이러한 동향은 물론 서독에도 있었다. 스탈린 치하의 강제수용소가 히틀러 치하 아우슈비츠의 원형이라며 나치독일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상대화했던 보수적 역사학자들의 주장으로 촉발된 ‘역사학자 논쟁’이 1980년대 중반에 있었다. 그러면 역사는 뚜껑 없는 동네 우물을 지나가다 아무나 두레박을 던져 길어올린 물로 오물을 씻을 수 있는 것처럼 과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가. 

그러면 역사는 무엇인가. 역사를 말하면 우리는 먼저 과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역사의 유용성을 떠올린다. 이런 관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이해의 기초가 되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처럼 역대를 통하여 치도(治道)의 거울이라는 뜻으로 역사를 해석했던 동아시아문화권의 역사인식은 물론 ‘역사는 삶의 선생이다’(historia magistra vitae)라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내려오는 서양의 전통적인 역사 이해도 같은 선상에 있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 과거에 설정된 도덕과 정치적인 규범의 지속성은 많이 제약받았으며 교훈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회의도 뒤따랐다. 이 문제는 특히 우리 현대사를 보는 데 있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친일하면 가문이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반대로 망했다는 것이 오히려 교훈이 되어, 회의 정도가 아니라 냉소적으로 역사를 대하게 된 것도 그런 예의 하나다. 

오늘 이 문제에 우리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이런 역사인식이 이른바 ‘탈(脫) 사실’(post factum)까지 공공연하게 주장되는 정보화시대에 더욱 힘을 얻기 때문이다. 역사를 중요한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계몽의 작업이 아니라 흡사 벼룩시장에서 골동품을 찾는 가벼운 기분으로 그저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처럼 여기는 오늘날의 시대적 분위기가 바로 그렇다. 작년에 사망한 미국의 역사학자 헤이든 화이트는 이른바 ‘메타 역사’라는 명제 아래 역사를 문학의 서술형식에 기대어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물론 우리가 아는 역사가 전혀 허구였거나 상상력에 의거했을 수도 있고 진실과 허구, 사실과 상상력이 교묘하게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 안에 복잡하게 서로 얽힌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이야기처럼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우리는 아직도 민족분단으로부터 비롯된 갈등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만이 유일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굳혀줄 수 있다고 믿고, 이에 모든 것을 거는 과잉기대 또한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의 현대사에는 공통성과 지속성도 있었지만 많은 이질성과 애매함도 같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무감각을 지적하고 자성을 촉구했던, 나무랄 데 없는 문 대통령의 3·1운동 100주년 기념사가 이념대립을 부추기는 ‘관제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노증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도 나왔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는 오로지 역사에 대한 불감증이나 과민증만 있어서 합리적인 역사이해에 바탕한 계몽은 기대하기 힘든가. 

독일의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레크는 우리의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 서로 얽힌 구조가 역사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유럽중세까지는 기독교가 이 두 인식범주의 차이를 줄일 수 있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계몽의 문을 연 근대에 들어서서 이 사이에 큰 괴리가 생겼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생긴 긴장이 오히려 역사의 추동력이 되었다. 이런 역사이해에 따른다면 어느 나라보다 과거체험과 미래에 거는 기대 사이에 심한 간극이 있었던 우리 현대사의 역동성도 설명될 수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을 남겼던 영국의 역사학자 카는 “사회가 너무 병들었기에 역사도 병들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우리 사회가 지금 앓고 있는 역사불감증이나 역사과민증은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역사병’이다. 과거와 끊임없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을 먼저 냉철하게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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