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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은 시를 통해서 내게로 왔다.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에서의 청산이 바로 그 무등산. 청산은 부산에도 있었다. 재수생을 가르치는 학원 이름. 청산학원을 통과하고 부산역을 떠난 이후 세월의 때를 묻히면서 나도 세상의 무릎 아래 정착했다. 무릎은 주름이 심하게 잡히는 곳이라서 그 문양이 아주 복잡하다. 광주도 광주였지만 무등을 만나야겠다는 건 오래된 생각이었다. 여름이 되면 무등산 수박에 침을 꼴깍 삼키겠지만 그보다 먼저 5월이 오면 무등산 꼭대기 생각이 났다. 기회가 왔다.

5월 첫 주말에 대학 동기들과 원효사-서석대-입석대-증심사의 코스를 잡았다. 초입에는 매미가 승천하는 모습으로 신나무 열매가 잔뜩 달려 있었다.

특이한 식물이 있나 두리번거렸지만 애기나리, 현호색, 광대수염 등등의 흔한 야생화들뿐. 광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망월동 묘지를 참배했다.

기념관을 둘러보는 동안 <허삼관매혈기>로 유명한 작가 위화의 산문집 <영혼의 식사> 중 한 대목이 떠올랐다. 그는 ‘한국방문기’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광주항쟁 과정에서 희생당한 열사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 내가 본 광주항쟁 희생자의 사진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눈이 감긴 것이 없었다. 그들의 무심한 눈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 후로 나는 그들의 눈이 한국의 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눈에 꽃가루라도 들어갔나. 눈두덩을 비비면서 묘지정문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었다. 가로수가 만개해 있었다. ‘입하(立夏)’ 무렵 꽃을 피운다고 그렇게 불린다는 나무.

흰 쌀밥이 쌓인 것 같아 ‘이밥’에서 유래했다는 나무. 이팝나무였다. 때맞추어 고맙게 핀 꽃은 뚜렷한 특징이 있다. 4갈래로 길쭉하게 갈라진 꽃잎 하나하나가 흐느끼듯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내 눈에는 꽃잎이 꼭 만장(輓章) 같은 이팝나무. 물푸레나무과의 낙엽교목.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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