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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의 한국 사회를 규정하라면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단연코 ‘반지성의 사회’ ‘증오의 사회’라고 부르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지성적 논의, 합리적 논쟁이 사라져 버렸다. 합리적 논쟁을 대신한 것은 누구 편, 어느 진영이냐는 편가르기와 진영논리다. 사람들은 어떤 주장을 접하면 더 이상 그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그 주장이 타당한가를 따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올바른 이야기를 들어도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그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그가 우리 편이냐, 아니냐일 뿐이다.


관계, 언론계, 학계에 종사하는 소위 잘나가는 대학 동기들의 친목모임이 있다. 당연히 이념적으로 생각이 다르니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곤 한다. 그러던 중 주요 언론의 중책을 맡고 있는 한 친구가 내뱉은 말은 머리를 망치로 치는 것같이 충격을 줬다. “요즘은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는다. 대신 왜 저 친구가 저 이야기를 하는지 따져본다. 고향이 어디지? 누구 편이지? 그것을 따지면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지성적 논의가 사라지고 진영논리만이 지배하는 ‘반지성 사회’가 돼 버렸다. 합리적 논쟁에 기초한 ‘지성의 정치’가 사라지고 진영논리에서 생겨난 ‘증오의 정치’가 지배하는 ‘증오 사회’가 돼 버린 것이다.


사실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윤창중 사태, 그리고 5·18 광주민중항쟁의 왜곡을 보면서 절망감에 빠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윤창중 사태의 비극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한심한 일탈이나, 구멍난 청와대의 위기관리체계나, 언론계에서는 다 알고 있었던 윤 전 대변인의 문제를 본인만 몰라놓고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것을 배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어이없는 해명이 아니다. 진짜 비극은 이 같은 사태도 진영논리에 근거해 박근혜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기 위한 ‘좌파의 음모’로 보는 일부 보수세력의 소름끼치는 사고방식이다. 


임명장 받던 윤창중 전 대변인 (경향DB)


‘5·18 사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호남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의 청와대 국정상황실장까지 지낸 사람이 종편의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나서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5·18이 북한 특수부대가 침투해 일으킨 것”이라는 상식 이하의 주장을 여과없이 소개하는 ‘반지성의 반공 선정상업주의’ ‘정치 포르노주의’에 할 말을 잃게 된다. 게다가 ‘일베’는 5·18을 전면적으로 폄훼하고 조롱하는 글들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같은 보수진영의 반지성적 진영논리와 증오의 정치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정과 타락, 그리고 ‘운동권의 탐욕’과 또 다른 증오의 정치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보수세력의 증오 정치가 별로 없었던 것은 민주화운동 진영이 절대적으로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 막아선 친노 (경향DB)


반지성주의와 진영논리는 보수나 극우세력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진보적 시각에서 비판하면 그 타당성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한나라당의 주구’라는 식의 반지성적 대응만이 날아왔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의 4주기 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추모행사에 참가하려던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과거 노 대통령을 비판하고 최근 친노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수모를 당하고 쫓겨나야 했다. 노 대통령의 생가나 추모 행사장에서는 ‘완장부대’들이 문을 지키고 앉아 제 편이 아닌 사람은 내쫓는 ‘완장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진보진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거의 종교가 되어 버린 자신들의 신념에 기초해 타인의 비판적 충고에는 귀를 닫고 있다.


비극적이지만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더 이상 지성이 아니라 진영논리에 의한 증오다. 특히 인터넷을 보면 절망적이다. 합리적 논쟁과 이를 통한 자기성찰과 자기정정이 없는 사회는 자멸할 수밖에 없다. 불행히도 우리가 그러한 길로 가는 것 같다. 답답한 일이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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