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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존재하는가?’ 몇 년 전 필자가 쓴 한 칼럼의 제목이다. 그렇다. 우리 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정치공동체는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이 같은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정권만 바뀌면 정부구조까지 바꾸는 기이한 정치권의 졸속주의, 한탕성과주의 때문이었다. 미국을 예로 들자면, 클린턴 정부에서 부시 정부, 부시 정부에서 오바마 정부로 정권이 바뀐다고 정부 부처가 생기고 없어지고 이름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정권만 바뀌면 정부 부처가 생기고 없어지고 난리를 친다.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존재하지 않고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과 같은 정권들만 존재하는 셈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의 정치적, 이념적 균열이 너무도 심각해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대한민국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교과서와 역사박물관 문제가 그 예이다. 우리는 군사독재를 미화한 군사독재시대의 교과서를 민주화 이후 개정한 바 있다. 그러나 보수정권들이 집권하자 이를 좌파적 역사관이라고 시비를 걸며 다시 뜯어고치고 있다. 이념적 성격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교과서가 바뀌고 학생들이 다른 내용의 역사를 배워야 하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건국 60주년을 맞아 건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역시 야당과 민주세력으로부터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어 이념이 다른 정권이 집권하면 이를 뜯어고치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


(경향 DB)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과 NLL사태도 마찬가지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은 국정원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이 아니라 특정 정권과 정파의 도구로 전락되고만 충격적인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는 최고 정보기관의 총수가 지난 10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고 지난 대선에서도 자유주의적 색깔의 야당을 다시는 권력을 잡아서는 안되는 ‘종북세력’으로 보고 불법적인 선거개입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집권을 막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념적 골이 깊다는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민주 정부들도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는 수구세력의 반발로부터 개혁과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잘못된 소명의식에서 광범위한 도청을 했다. NLL사태 역시 기밀을 지켜야 하는 정보기관이 국가비밀을 공개한 것도 문제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똑같은 정상회담 회의록을 놓고도 어떻게 그처럼 판이하게 다른 해석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다. 즉 최소한의 상식과 언어를 공유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란 정치공동체는 사라지고 이념적 균열이 얼마나 심각하기에 같은 문장을 놓고도 다른 해석에 기초해 사생결단의 논쟁을 하느냐는 것이다.


현대민주주의의 핵심인 다원주의와 관용사상은 유럽의 심각한 종교분쟁 속에서 생겨났다. 다른 종교를 탄압할 경우 자신들도 남과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을 수 있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인식을 통해 다원주의와 관용사상이 생겨났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의 정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최근의 정권교체를 통해 배웠듯이 아무리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교과서를 만들고 역사를 강요해봐야, 또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책을 만들어봐야,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이를 뜯어고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같은 역지사지의 인식에 기초해 초정파적으로 개방적인 논쟁을 거쳐 정권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을 합의에 기초한 정책들을 만들어 나가는 ‘역지사지의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 물론 이들 문제는 무엇이 옳은 것인가 하는 ‘진리의 정치’가 개입돼 있는 만큼 합의와 타협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의견이 다른 세력들을 말살하거나 모두 수용소에 감금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렵더라도 역지사지를 통한 합의의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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