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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마피아 영화에 나올 법한 장면을 상상해본다. 마피아들이 관리하는 지역에 새 식당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 식당 주인은 조직에 ‘세금’을 내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그는 마피아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자릿세를 뜯겨선 안된다고 주변 상인들을 설득하고 다닌다. 조직에 이 식당 주인은 점점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결국 행동대장은 안락한 의자에 앉아 시가를 피우고 있는 보스에게 다가가 식당 주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다. 보스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알아서 해.” 행동대장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자리를 뜬다. 얼마 후 갑자기 자취를 감춘 식당 주인은 한 달쯤 뒤 인근의 강에서 시신으로 떠오른다. 

다행히도 정의로운 검사가 식당 주인 사망 사건을 끈질기게 수사해 행동대장을 법정에 세운다. 검사는 행동대장이 독단적으로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 뒤, 살인사건 배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보스까지 잡아들이려 한다. 

보스의 변호인들은 무죄를 주장한다. 보스는 식당 주인을 살해하라는 명확한 지시를 내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보스가 ‘알아서 해’라고 하긴 했지만, 그 말이 곧 살인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저 원만한 해결책을 지시했을 뿐인데 행동대장이 제멋대로 식당 주인을 죽였다”는 것이 변호인들의 논리다. 

조직의 ‘꼬리 자르기’와 보스의 비겁함에 발끈한 행동대장이 적극적으로 증언하기 시작한다. 행동대장은 보스가 구체적으로 ‘살인’을 지시한 적은 없지만, 조직에서 ‘알아서 해’라는 말은 당연히 살인을 뜻한다고 항변한다. 아울러 지금까지 보스가 자신의 행동을 질책하거나 말린 적도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보스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알아서’ 처리해온 자신의 서열을 높여줬다고 증언한다. 판결을 예단할 수는 없지만, 이쯤되면 검사가 보스와 행동대장의 공범 관계를 입증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실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비해 폭력 조직에 대한 영화가 그토록 많은 이유는, 폭력 조직의 행태가 사회 구성 원리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가상의 마피아 영화는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소재를 다뤘지만, 기업이든 학교든 위계가 있는 조직에서는 비슷한 일이 벌어지곤 한다. 

대법관을 눈앞에 둔 전도유망한 법관이었던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지금 구속 상태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양승태 대법원’의 역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도입을 관철시키기 위해 박근혜 정부의 구미에 맞게 ‘재판 개입’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물론 임 전 차장은 혐의를 철저히 부인한다. 일선 판사들이 재판에 참고할 만한 자료를 제공했을 뿐, 재판에 개입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사실상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비서조직이었다. 대법원장-법원행정처장-법원행정처 차장으로 내려오는 위계질서는 3000여명 가까운 전국 판사들의 머리에 선명히 그려져 있을 것이다. 일선 판사들이 법원행정처 차장의 자료를 ‘참고’만 할 수 있었을까. 법원행정처의 ‘자료’란 마피아 보스의 “알아서 해”라는 말과 비슷한 효과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재판에서 직권남용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 양승태·임종헌 두 전직 고위 법관은 한때 까마득한 후배였던 판사들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검찰의 공소사실을 당당하게 반박하고, 직권남용에 대한 복잡하고 치열한 법리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법정에 선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이 어떤 판결을 받을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다만 향후 드러날 유·무죄 여부를 떠나, 권력자의 자세와 처신에 대해서는 지금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의 선의를 있는 힘을 다해 최대한 믿어보자. 마피아 보스가 “알아서 해”라고 한 것은 식당 주인과 대화해 원만한 합의점을 찾으라는 지시였고, 법원행정처의 ‘자료’란 일선 판사들의 충실한 재판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고 믿어보기로 하자. 그렇다 해도 권력자의 ‘선의’는 조직 내에서 손실 없이 전달되긴 어렵다. 권력은 인간관계를 굴절시키기 때문이다.  

어느 기업의 고위 임원이 있다. 회의를 앞두고 얼마전 들은 농담을 던졌더니 주변 사람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유머 감각에 자신감이 생긴 임원은 그날 저녁 동창 모임에서 같은 농담을 했다. 이번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임원이 조금이라도 현명했다면 깨달았을 것이다. 부하 직원들은 임원의 농담이 웃겨서 웃은 것이 아니라, 그가 상관이었기 때문에 웃었다. 

부장의 ‘권유’는 때로 직원에게 ‘강요’가 된다. 교수가 ‘무심코’ 던진 말에 학생은 종일 안절부절못할 수도 있다. 한줌의 권력이라도 가졌다면 쉼없이 자신의 자리를 돌아봐야 한다. 어쩌면 그건 직권남용, 공무집행방해, 공무상비밀누설 같은 죄를 벌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백승찬 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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