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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소 한쪽에 쇠붙이로 된 활자를 하나하나 채자하던 이들이 사라진 뒤 등장한 것은 사진식자기라는 기계였다. 문자를 렌즈로 찍어 출력해내는 이 기계는 대개 책상만 했다. 남쪽 촌에서 나고 자랐다는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서 곧바로 학원에 들어가 사진식자기 기술을 익혔다고 했다. 그가 다루는 사진식자기는 일본어와 중국어까지 뽑아내는 거라서 아주 컸다. 다행히 그는 덩치가 꽤 커서 거대한 기계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일본어나 중국어를 배운 적이 없다고 하면서도 아주 빠른 속도로 글자를 찍어냈다.

그의 실력으로 보자면 손바닥만 한 인쇄기획실에서 적은 월급을 받으며 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출근 첫날부터 마치 오랫동안 일한 사람처럼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고, 틈틈이 커피를 타서 동료들 책상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는 사진식자기 일을 하는 이들은 까다롭고 고약하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줬다. 동료들은 금방 그를 좋아했고, 온종일 얼굴 찌푸린 채 직원들을 다그치는 게 일인 사장도 그에게는 잔소리하지 않았다. 

등 너머로 편집 일을 배워서 툭하면 출력된 용지를 찢어먹던 나한테 그는 구세주며 원더우먼이었다. 그는 일이 서툴러서 허구한 날 밤 늦게까지 일하던 나를 늘 기다려주며 풀칠까지 해줬다. 어느 날 함께 야근하고 나와 맥줏집에 앉아서 그가 살아온 얘기를 들었다. 첫 직장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인쇄소였고, 그곳에서 노조 활동을 했다는 그는 내게 은밀하게 말했다. “사실은 그때 내가 앞장서서 다른 데 취직을 못해. 그래도 싸우면서 내가 처음으로 누군지 알았어.”

그는 자신이 노동자라는 것을, 노동자라는 게 얼마나 힘이 솟는 말인지를 알았다고 했다. 온종일 그가 뽑아준 문자를 꼬물꼬물 붙이고 앉아 있던 나는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며칠 전 ‘작가도 노동자인데, 그리 인식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오래전 내 친구가 생각났다. 노동자라면 자신의 일을 즐길 줄 알고, 부당한 일에 싸울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던 그의 말을 나는 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의 친구, 나의 원더우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그립다.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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