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보수성향 방송인인 폭스뉴스의 로라 잉그램은 NBA 선수 르브론 제임스가 못마땅했나 보다. 덩치 큰 흑인 농구 선수가 도널드 트럼프의 가치관과 정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비판하는 모습을 참아주기 힘들었던 것 같다. 잉그램은 방송에서 제임스의 말이 문법에 맞지 않고 지적이지도 않다며 이렇게 말했다. “입 닥치고 드리블이나 해.” 제임스는 스타답게 반응했다. “전 입 닥치고 드리블만 하진 않을 겁니다. 전 이 사회와 청소년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존재거든요. 그녀 덕분에 좀 더 각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 이름이 뭔지 모르겠지만 고맙네요.”

르브론 제임스는 스테펀 커리와 함께 현재 NBA를 대표하는 선수다. NBA 정규리그 MVP를 네 차례 차지했고, 올림픽에도 출전해 두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제임스가 고향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떠나 마이애미 히트로 옮긴다고 발표한 텔레비전 쇼가 75분간 생중계될 정도였다. 하지만 슈퍼스타이자 갑부인 제임스조차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인종문제에서 자유롭진 않았다. 지난해 제임스의 로스앤젤레스 저택 정문에는 ‘깜둥이’라는 스프레이 낙서가 휘갈겨져 있었다. 제임스는 낙서를 본 뒤 “아직 할 일이 많다고 느꼈다”고 돌이켰다. 제임스의 동료인 케빈 듀런트도 거들었다. “전 농구에서 모든 걸 배웠습니다. 사람들의 힘과 용기를 북돋워야 한다고. 그래야 위대한 팀을 만들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 나라라는 팀에는 위대한 코치가 없습니다.”

이상화가 18일 강릉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5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일본 고다이라와 태극기를 들고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올림픽은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4년간 연마한 실력을 한 자리에서 선보인다. 스케이터들의 역주에 내 허벅지 근육이 꿈틀거린다. 스노보드 선수의 점프를 보면 가슴이 뻥 뚫린다. 맨몸의 선수가 시속 130㎞의 썰매 위에서 질주하는 모습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 아찔하다. 종목명, 규칙, 선수 이름을 몰라도 상관없다. 인간이 만든 경기규칙, 최고의 기술력을 활용한 장비, 혹독하게 다져진 육체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일까. IOC는 선수들의 ‘정치적 표현’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때 축구 선수 박종우가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쓰인 종이를 펼쳤다가 동메달을 박탈당할 뻔하거나, 평창 동계올림픽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골리 맷 달튼이 이순신 장군이 그려진 마스크를 쓸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정치적 진공’은 없다. 올림픽 역시 온갖 이데올로기가 충돌하고, 정치 전략이 맞붙고, 사회적 욕망이 들끓는 공간이다. 평창 동계올림픽도 그렇다. 대회 초반 미국, 북한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외교전 역시 한 사례다. 한국 대표팀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이전에 ‘한국인’이라고 보기 힘들었던 이들이 한국 대표 선수로 나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이애슬론의 티모페이 랍신, 루지의 에일린 프리쉐는 어느 모로 봐도 ‘외국인’이지만, 태극 마크를 달고 한국을 대표해 뛴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에서 뛰며 역사적인 올림픽 첫 골을 넣은 랜디 그리핀 희수는 한국인 어머니,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 한국선수단 146명 중 이들 같은 ‘뉴 코리안’은 21명으로 전체의 14%에 달한다. 캐나다 교포인 남자 아이스하키팀 감독 백지선은 “내 눈엔 그들 모두 한국을 대표하는 한국인이다. 피부색이나 눈 색깔이 다를지는 몰라도 그들은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어를 말할 줄 알고, 동료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이번 평창 올림픽은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 등에 영향을 미치리라 짐작한다”고 말했다. 피를 나눴지만 얼굴도 가물가물한 친척보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친구가 나를 더 잘 이해하는 법이다. 우리를 대신해 노력하고, 우리의 자부심을 높이는 사람이라면, 그의 인종이 무엇이든 ‘한국인’이다. 한국의 이상화,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의 우정은 최고 수준의 ‘지음(知音)’에게는 국적이 거추장스러운 딱지일 뿐임을 보여준다. 국가, 민족, 인종의 경계는 평창에서 흐릿해지고 있다.

이번 올림픽은 성소수자 인권운동 측면에서도 큰 전기가 될 만하다. 평창 올림픽 참가 선수 중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는 미국 남자 피겨 선수 애덤 리펀, 네덜란드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이레인 뷔스트 등 13명에 달한다. 이는 역대 최다 수치다. 미국의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 거스 켄워시는 방송 카메라 앞에서 남자 친구와 입을 맞추는 ‘역사적 장면’을 연출했다. 2014 소치 올림픽에서 러시아의 반동성애 정책이 이슈가 되었음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다. 역사는 느리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평창은 보여준다.

르브론 제임스는 말했다. “나는 운동선수 이상의 존재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올림픽은 체육경기 이상의 행사다.”

<백승찬 토요판팀장>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