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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법학교수와 변호사들이 길거리에 나앉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16일 동안 법원 앞에 천막을 쳤다. 278명의 법률가들이 마음을 모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두 사건이 떠오른다. 지난 1월 특검이 신청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청구가 법원에서 기각된 것과 얼마 전 법원이 발부한 압수수색 영장이 청와대의 물리적 거부로 불발된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은 법이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음을, 청와대 압수수색 불발은 법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특검이 신청한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조의연 판사는 뇌물죄에 대한 특검의 수사가 충분하지 못했고, 구체적 사실관계와 법률적 평가를 둘러싸고 다툼의 여지가 있는 점을 영장기각사유로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의 강요에 의해 최순실 등에게 회사 자금을 지원하였다면 삼성으로선 억울하게 빼앗긴 돈이지, 대가를 바라고 준 뇌물이 아닐 수 있다는 논리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진 대기업이 억지로 돈을 빼앗겼다는 것도 믿기 어렵거니와, 강요에 의해서라 할지라도 7조원이 넘는 이 부회장 개인 재산을 두고 회사 자금으로 지원한 것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조직적인 증거인멸을 통해 실체적 진실이 은폐될 위험이 매우 높은 집단범죄의 경우, 의사 결정권을 가진 최고책임자를 조직과 분리할 필요가 있는데도 이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법을 공정하게 해석해야 할 법원의 혜량(惠諒)이 유독 기업 총수 같이 힘 있는 사람들에게만 관대하다는 점은 큰 문제다. 수백억 회사자금을 횡령한 범죄를 저지른 재벌총수도 ‘기업을 경영해 국가경제에 기여한 사정’을 유리한 양형사유로 인정하지만, 수년간 성실하게 일한 버스노동자가 착오로 2400원을 회사에 적게 입금한 것을 두고 ‘기본적인 신뢰를 저버리는 중대한 위반 사유’라며 해고가 적법하다고 판결한다. 평등과 정의를 실현해야 할 법원이 약자에게 가혹하게 군림하고 강자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던 잘못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 법률가들이 농성에 나선 첫 번째 이유다.

지난주 특검은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았다. 그러나 청와대 직원들이 물리적으로 막아서는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직책과 권한이 없는 민간인 최순실, 주사아줌마 등은 보안손님으로 자유롭게 드나들던 청와대에 법원이 발부한 영장을 가진 특검 수사관은 들어가지 못했다.

압수수색 장소는 청와대 경호실, 의무실, 민정수석비서관실 등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죄, 세월호 7시간, 블랙리스트 등 지금까지 밝혀진 국정농단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안보시설에 대한 압수수색 제한 규정과 압수수색을 받은 전례가 없다며 막아서는 청와대의 억지에 법원이 발부한 영장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사실 전례가 없기로는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 견줄 것이 없다. 수천만의 주권자가 촛불을 들고 매주 광장에 모여 박근혜 퇴진과 국정농단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이를 위해 특검이 활동을 시작했다. 즉, 특검이 발부받은 압수수색 영장은 진실을 밝히라는 수천만 주권자의 요구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궁색한 법 규정을 형식적인 방패막이로 엄중한 주권자의 명령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법을 정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방해하기 위해 악용하는 권력자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농성에 나선 또 다른 이유다.

법은 결국 최소한이다. 그동안 법은 공평하지 못했고, 정의와 민주주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었던 적이 많았다. 지금이라도 주권자의 이름으로 그동안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추운 겨울 강단과 법정 대신 법원 앞 노숙농성을 택한 법률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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