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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는 순조로웠다. 상제들은 마음을 다치지 않았다. 허투루 쓰이는 돈이 적었고, 마음에 없이 예를 차리지도 않았다. 길고도 짧았던 이틀밤 동안 큰소리도 한번 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원에 실려 가신 것도, 그리고 그 다음 일도 모든 것이 급작스러웠던 까닭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순조로웠다’라고 적어 둘 수 있을 것이다.

장례 문화를 바꾸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연명치료에 대한 뜻을 미리 밝혀 놓듯이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절차를 미리 적어 두거나, ‘조문보’, ‘엔딩 노트’ 같은 것을 만들거나, 무엇보다 ‘작은 장례’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에 드는 시간과 돈을 줄이려고 하는 것들이다. 서울 서대문구는 지자체가 나서고 있고, 몇몇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가운데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이름을 알고 있어서 이곳에 장례를 맡겼다.

병원에 딸린 장례식장, 그곳에서 이어지는 장례 절차는 2박3일 동안 거침이 없다. 전국 어디를 가나 별로 다르지 않다. 장례식장 안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흔히 상제들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은 그 모든 절차마다 장사치들의 뻔한 수작질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부모가 돌아가신 사람을 앞에 두고, 그 마음을 휘젓고 긁어서 돈을 뽑아낸다. 앞서 다행이라고 한 것은 장례를 맡긴 조합이 그런 수작질만큼은 하지 않으려는 곳이어서였다. 조합에서 나온 장의사(장례지도사)의 말투는 차분했고, 공손했다. “수의는 평소에 아끼던 옷이 있으시면 그것으로 하셔도 좋습니다.”, “여기 장례식장이나, 납골당 비용에서 저희 조합으로 나중에 리베이트가 오는데요, 그런 것은 모두 돌려 드립니다.” 무엇도 권하는 투로 말하는 것이 없었고, 하나하나 내가 처음 듣고도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고 꼼꼼하게 설명을 했다. 납골당에서 장의사는 관리인에게 리베이트에 해당하는 금액을 아예 할인해서 계산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30만원이 줄어들었는데, 며칠 지나서 장의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쪽에서 제 말을 잘못 알아들었나 봐요. 30%라고 했는데, 30만원만 깎고 나머지는 여기로 보냈더라구요. 이 돈은 오늘 보내 드릴게요.”

발인날 새벽, 장의사는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왔다. 긴 밤을 보낸 상제들과 친척들이 탁자 사이에 몸을 누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장의사는 제단 앞에 서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는, 한 송이씩 꽃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철끈으로 꽃송이 몇 개씩을 묶어서는 어버이날 가슴에 달 만한 크기로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금 더 큰 것도 몇 개 만들고, 아주 큰 것도 하나. 그새 잠에서 깬 우리집 아이들은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는 저들도 하나씩 꽃다발을 묶었다. “납골당에 가셔서 상제분들이 하나씩 놓아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요. 꽃이 싱싱하고 좋네요.”

그날의 일을 되짚어 글로 쓰는 동안 절로 고마운 마음이 되살아난다. 거의 모든 일을 장의사에게 맡겨 두었고, 특별히 장례 절차를 치르는 일로 마음고생, 돈고생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고마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장례를 치르는 다른 숱한 사람들이 어처구니없는 사기와 기만을 당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지난해에 마을에서 상을 치르면서 두 번쯤 무덤에 뗏장을 입히는 데에 손을 보탰다. 일을 마치고 어른들과 밥을 먹는 사이, 돌아가신 분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둘 오고 갔다. 젊어서 결혼하고 아이들 낳아 살았던 이야기,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 여기서 한마디 하면, 옆에서 한 자락 받아서 덧붙이는 식으로. 흙으로 덮일 만큼 떼를 눌러 주어야 떼가 잘 퍼진다면서, 이제 그만해도 될 성싶은데도 무덤가에 오랫동안 둘러서서는 이야기도 그만치 흘러나왔다. 죽은 이 곁에 산 사람이 둘러앉아 서로 그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이 장례의 마지막이라는 듯, 이야기가 얼마큼 차올라서야 사람들이 일어섰다.

전광진 | 상추쌈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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